“현대 의학은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다.” 현직 의사인 저자의 직언이 날카롭다. 건강한 사람도 외면할 수 없는 말이다. 언젠가 우리는 노화로 아플 것이고 아플 예정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치지 않은 일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이다. 일침이었다. 아파서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을 때, 존엄하게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장 나약해진 순간, 비인간적인 의료 환경에 맡겨지는 건 시간 문제이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는 현직 의사가 의료 현장에서 몸소 체험한 글이다, 실상에 뿌리를 둔만큼 의료계에 대한 성찰이 구체적이고 문제적이다. 현실을 관통하는 저자의 문제 의식과 그에 응답하는 저자의 심정이 쓸쓸해 보인다. ‘고통받는 인간을 알아차리고 질병 배후에 있는 인간을’ 보고자 애쓰는 저자의 모습이 따뜻하다. 저자는 수자원공사에서 진행하는 왕진 프로그램에 참여한 왕진의사이다. 이 책은 의료 취약 노인층을 찾아가 진료했고, 그 경험에 뿌리를 둔 결과물이다. 저자는 “공공의료의 결여가 누군가에게는 추상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고통이다”라고 말한다.
‘공공의료의 결여’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참여할 당사자가 나 자신이라는 의식이 없었던 게 솔직한 고백이다. 에릭 올린 라이트가 쓴 <리얼 유토피아>에 의하면, 국가 권력과 경제 권력에 시민 권력을 어떻게 강화하느냐에 따라 공공성이 강화된다고 한다. 공공성에 대한 민감도가 건강한 사회에 대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왕진의 주체가 민간의료가 아니라 공공의료 영역’으로 바뀌길 제언한다. 공공의 차원에서 방문 진료 사업이 확대되고 우리 사회에 안착된다면, 노년의 아픈 몸은 소외되지 않고 견딜만할 것이다.
전체 환자의 99%는 동네의원에서 커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본 집약적인 병원의 대형화가 진행되고 동네의원이 존폐위기를 맞는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나부터도 정밀한 장비를 갖춘 대형 병원을 먼저 신뢰하고 긴 대기표를 감수해 왔다. 공공의료 병원에 대한 인식의 부족, 국민건강보험과 민간의료보험의 연혁에 대한 배경과 개념의 이해 결여, 의료 공공성에 대한 관심의 부재, 진료량에 따라 보상을 받는 행위별수가제와 질환별로 정액의 보상을 받는 포괄수가제에 대한 장단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1분 진료’ ‘과잉 진료’ 그리고 ‘병원간 대형화 경쟁’이 우리를 잠식했던 게 현주소이다. 이를 방치한 채로 노후를 대비한 경제력만 갖춘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나의 경제력을 강화해야만 할 문제일까? 자문해 볼 일이다.
환자와 돌봄은 가족의 책임과 의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자본의 힘 앞에 누구나 불안하다. 건강불평등이 심화되어가는 조짐이 느껴진다. “대형병원과 자본의 힘은 시민들, 개구리들의 침묵 속에서만 발휘된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은 민영화 법안이나 인수합병을 허용하겠다는 정부 여당의 방침이 아니다. 무관심이다.....동네의원을 지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그래서 정부 여당도 국회의원도 공무원도 아니다. 시민의 침묵과 무관심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목소리가 엄중히 들리는 건 나만의 불안일까.
글쓴이. 눈꽃송이님
* 이 글은 '서평쓰기'를 수강하신 분이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