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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Nov 12. 2020

이토록 참혹한 국가 폭력의 뿌리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허금철・홍은전・강혜민・김유미 글, 오월

사회를 알려면 한계 아래를 봐야 한다  

예전에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고물상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오랫동안 고물상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해온 고물상 주인이 말했다. “인생을 알기 위해서는 한계가 아니라 그 아래를 봐야 한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구술 기록집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의 느낌이 딱 그랬다.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한계가 아니라 그 아래를 봐야 한다.’ 

한계 아래를 정면으로 주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어느 정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한계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참혹함,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불합리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도 그랬다. 스스로 진보연한 까닭에 민중이라든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면서도 정작 ‘한계 아래’에 눈길을 주는 것은 꺼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다분히 심리적인 방어기제도 있었던 것 같다. 나 자신이 도시빈민 출신으로 언제 가족이 해체되어 바닥 아래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너무 천착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불행의 그림자가 나에게로 옮겨와 붙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좀 크고 나서는 우리나라의 민주화 수준이 높아지면 최하층민이 겪는 문제들 역시 자연적으로 해결될 거라 믿었던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인식이 먼저 있고, 실천이 뒤따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순서가 바뀐 것이었다. 

사회 민주화를 위해서는 최하층민이 겪어야 했던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의 문제를 먼저 알아야 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비민주성, 반인권, 시민권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비민주성, 반인권, 시민권 부재를 온몸으로 오롯이 겪은 사람들의 증언집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 뒤편에서 벌어지는 날 것 그대로의 국가폭력을 목도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한 참상

선감학원은 안산 옆 조그만 섬 선감도에 있던 부랑아 수용시설이다. 주로 불우한 환경의 소년들이 끌려가 수용되었다. 이 시설에서 아이들이 겪은 학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아이들은 누에, 염전, 농사, 축산에 동원되었다. 대가도 지불받지 못하는 노예였다. 양잠반에서 일했던 원생의 증언이다. 

“아이들의 경우, 잠도 못 자고 두 시간 마다 일어나서 누에 밥을 줘야 해요. 안 그러면 누에들이 예민해서 다 죽어요. 온도도 맞아야 하고. 뽕을 따서 지하실에서 선풍기로 말려야 하는데, 너무 오래 놔두면 썪어 버립니다. 이슬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어도 누에들이 설사를 해요.” 양잠반 아이들은 누에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뽕잎이 떨어지면 밤이고 새벽이고 얄짤 없이 일어나, 뽕잎을 따러 가야 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가두었던 부랑인 시설인 부산의 형제복지원에는 3000명이 잘 수 있는 숙소, 식당, 교회가 있었다. 그 역시 원생들의 강제노동으로 지어졌다. 원생들은 노예가 되어 자신을 가두는 시설을 스스로 지어야 했다.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에서는 구타가 일상이었다. 복장 검사, 비품 검사, 위생 검사, 직무 검열 등 맞을 이유는 천지였다. 하루에 빠따 다섯 대 이상 안 맞으면 잠이 안 올 정도였다. 맞기 전엔 두려웠고, 맞고 나면 안도가 됐다. 8~9살 애들 엎드려뻗쳐 시켜서 빠따를 치는데, 멍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살이 터졌다. 심지어 빠따를 하루 종일 맞은 적도 있었다. 뭘 훔쳐 먹었다고 맞고, 뭘 못했다고 맞고, 조금 쉬었다가 맞는 식으로. 규율 잡는다고. 

가혹행위도 일상이었다. ‘지옥탕’이라고 소변보는 웅덩이를 파놓은 곳이 있는데, 거기에 사람을 집어넣은 채로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시킨 적도 있다. 그러면 자연히 오줌을 먹게 된다. 고문과 학대는 교육과 훈련으로 포장되었다. 겨울은 혹독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담요 한 장 깔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동상에 걸렸다. 몰래 속옷을 여러 개 겹쳐 입었는데, 그랬다고 두들겨 맞았다. 원생들은 광목으로 된 홑껍데기 옷 하나로 추운 겨울을 나야 했다. 

가혹행위는 원생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다. 선감학원 원생들은 ‘개척사’나 ‘창조사’ 같은 사로 나눠져 있고, 하나의 사(社)는 다시 방(房)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사나 방에는 ‘사장’과 ‘방장’이라 불리는, 4~5살 많은 간부 원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가혹행위도 극심했다. 한겨울에 자다가 연탄불이 꺼지면 방장은 원생들을 사정없이 팼다. 원생들로 하여금 서로의 뺨을 휘갈기게 하는 체벌도 일상이었다. 심지어 경비도 원생이었다. 원생이 원생의 탈출을 감시했다. 도망가다 잡히면 옷 다 벗기고 물 뿌리고 때리는데, 살점이 뚝뚝 떨어져나가는 걸 그 어린 나이의 소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봐야 했다. 

사장들은 아무 이유 없이 원생끼리 패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이른바 ‘전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개척사와 창조사 원생들은 서로 박이 터져라 싸웠다.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이 기본적으로 분할통치와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통제하고 부림)의 방식이었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같이 먹고 잤건만, 원생들 간의 관계에 대해 묻자 “좋은 건 없어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굶주림도 혹독했다. 형제복지원은 시장에서 팔고 버리는 생선 대가리, 시래기 같은 것들을 수거해서 반찬과 국을 만들었다. 그 마저도 양이 너무 적었다. 허기는 또 하나의 장기처럼 늘 배에 붙어있었다. 선감학원에 대한 증언이다. “식당 아주머니가 오물 치우던 삽으로 퍼준 밥은 수저질 서너 번이면 사라졌고, 반찬은 단무지에 콩자반 열 알, 멸치. 오뎅이 나오면 잘 나오는 거였다. 어느 날은 오뎅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구더기였다.” 굶주린 아이들은 뱀, 물방개, 잠자리, 산도라지, 칡뿌리, 냉이 등 요기가 될 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먹었다. 어떤 아이는 사무실에 콜라병 같은 게 있어 배가 고파 그걸 마셨는데, 농약이었다. 아이는 죽었다. 굶주림을 참지 못해 독버섯 먹고 죽은 아이, 배가 고파 담요 뜯어 먹다 죽은 아이도 있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릎 쓴 탈출을 감행했다. 아이들은 굴 껍데기 위를 맨발로 뛰느라 얼굴까지 튀어오르는 피 냄새를 맡으며 달렸다. 그러다 갯벌 수렁에라도 빠지면,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를 건져 올리면, 소라와 낙지가 들러붙어 눈구멍부터 파먹고 있었다.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당시에는 북에서 공비가 자주 내려왔는데, 해군 배에서 경비를 서는데 헤드라이트를 비춰서 공비처럼 보이는 게 있으면 그냥 총으로 갈겼다. 

죽은 후에도 존엄은 없었다. 도망치다 물에 빠져 죽은 아이에게서 냄새가 지독하다고 빨간 소독약을 뿌려댔다. 섬을 탈출하다 바닷물에 빠져죽은 아이, 저수지에 빠져 죽은 아이, 맞아 죽은 아이, 굶어죽은 아이들은 뒷산에 아무렇게나 암매장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시신들이 드러났다. 형제복지원에서는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해도 551명이었다. 일부 시신은 한 구당 300~500만원씩에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팔려갔다.    

  

국가의 아동 납치, 인신 매매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은 국가의 관리와 지원을 받는 사회복지시설이었다. 사람들을 잡아다 시설에 보내는 것도 주로 경찰이나 단속 공무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준은 부랑성과 불량성이 있는 사람을 잡아넣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이었다. 그냥 입성이 좀 꾀죄죄한 채로 돌아다니거나, 경찰이 수상하다 여기면 특별한 위법행위가 없어도 언제라도 단속, 구금되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었다. 한 소년이 뱃일하는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그냥 하릴 없이 걸었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았다. 경찰이었다. “너 엄마 아버지 없지?” “아버지가 데리러 온다 그랬는데……” 경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좋은 데 보내주겠다고만 했다. 끌려가던 소년은 근처에 큰집이 있으니 그리로 보내달라 애원했다. 그러나 경찰은 들어주지 않고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러더니 다음날 아침 잡혀온 다른 소년들과 함께 10시 고깃배로 선감학원에 보내졌다. 그 길로 소년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곡마단을 구경하다 한 아이가 길을 잃었다. 아이는 경찰에 인계되었다. 이럴 때 우리는 당연히 경찰이 아이의 신원을 파악한 후 부모를 찾아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 소년은 갑자기 아동보호소로 옮겨진 후, 고아원과 선감학원을 전전하게 된다. 이 책에는 이런 사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러면 경찰은 왜 그랬을까? 부랑아 단속에 경찰서마다 할당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상 아동 납치이자 인신매매다. 이런 아동 납치가 국가 권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니 가족이 실종신고를 해도, 아이가 돌아올리 없었다. 

그러면 당시 정부는 왜 경찰이나 공무원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정권의 정통성 부재 때문이었다.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은 둘 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하에 불거진 문제였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와 전두환은 둘 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 확대하기 위해서는 악역이 필요했다. 그 악역이란 사회를 혼란과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 많아야, 자신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할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별로 없다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했다.

이때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 최하층민이었다. 정권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들을 단속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4.19 당시 대학생 시위는 이승만의 하야로 봉합되는 듯 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도시 하층민들의 시위는 그 이후로도 꾸준히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막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게 부담이었다. 박정희의 쿠데타 명분 중 하나가 ‘민생고 해결’이었다. 민생고가 해결되지 않아 하층민들의 시위가 격화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독재 정권에게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 같은 부랑인 수용시설은 매우 유용했다. 말이 복지시설이지, 사실상 감옥의 역할을 했던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 같은 시설에의 구금과 그곳에서의 인권 유린은 조금이라도 불온하게 보이면 누구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시설은 교도소가 아니기에 오히려 더 편리했다. 사람을 교도소에 보내려면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복지시설은 그런 것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시설에 수용된 많은 사람들은 그 만큼 사회가 혼란과 위기에 봉착해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독재 정권은 이런 시설을 홍보함으로써 자신들의 집권으로 사회 위험요소가 사라지고, 사회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사회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이 순화 교육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전했다.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의 문제는 일부 복지 시설의 문제도 아니고, 일부 극빈층(계급)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정치의 최전선에서 생긴 문제로 봐야 한다.     


제국주의자의 눈으로 자국민을 보다 

이 책의 맨 뒤에는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에서 그렇게 참혹한 인권유린이 자행된 이유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담겨있다. 바로 선감학원의 역사다. 선감학원의 역사는 생각보다 유구하다. 선감학원이 설치된 때는 1942년으로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부랑아를 ‘불량소년’으로 칭하며 “1인의 불량소년을 방임한다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격증하여 필경 그 사회는 불량군으로써 충만되고 말 것”이라며 부랑아들을 사회 위험요소로 보았다. 그리고 이들을 강제 수용할 시설로써 선감학원을 설치했다.  

일제가 말하는 불량소년의 기준은 모호하고 자의적이었다. 모자를 이상하게 쓰는 것, 옷에 특색을 내려고 하는 것, 모자표를 꾸브리는 것, 양복 안에 이름 쓰는 것을 띄여버리는 것, 이상한 구두를 신는 것 모두가 불량소년의 신호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보호, 선도, 갱생이라는 미명 하에 강제구속, 예방 구금했다. “총후의 꿋꿋한 황국신민”을 연성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일제는 강제 수용된 아이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했다. 선감학원의 반인권적 행태의 뿌리에는 일제가 있었다.  

이 책에는 선감학원 출신인 김성민 씨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경찰이 어떻게 그랬냐는 말이에요……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도 아닌데……어째서 경찰이 그 어린 아이들을 그런 곳에 붙잡아 넣고, 어떻게 경기도가 운영하고 국가가 관리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냐는 말이에요.” 무서운 직감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형태의 말이긴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민중이 겪을 법한 일을 자신이 겪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는 만주에서 독립군 때려잡던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 "일본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한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은 결심"이라며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그는 뼛속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계승자였다. 그가 결행한 5.16 쿠데타는 1936년 일본의 극우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쿠데타’가 모델이었다. 그가 추진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일제가 자신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에서 행했던 것을 본 딴 것이었다. 새마을운동,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조회, 군사교육, 충효교육, 국민교육 헌장, 퇴폐풍조 단속, 반상회 같은 통제장치들 역시 일제가 만주국에서 행했던 것이었다. 1972년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인 ‘10월 유신’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따온 말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저서 『지도자 도(道)-혁명과정에 처하여』에 이렇게 썼다. “을(국민)이 병이 들어 갑(지도자)의 치료를 받아야 할 때에는 의사와 환자란 조건하에 갑은 을의 식사를 제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 집을 떠나 병원에 입원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금번 군사혁명(5.16 쿠데타)은 일종의 수술이다.” 국가의 실체는 국민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국민을 철저히 대상화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국민의 병을 고치는 의사를 자임하고 있다. 이러한 파쇼적 사고는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를 내면화한 탓이다. 그는 자국민을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 민중을 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후계자였다. 그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며 군부 내에서 승승장구했고, 5.16 쿠데타 때에도 육사 생도의 지지시위를 주동했다. 전두환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광주학살을 계획했다. 사실 집권하는 것만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시민을 대량으로 학살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5.16 쿠데타만 떠올려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면 전두환은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이에 대해 우리는 1980년 6월 11일 미국 국방정보부에서 생산한 2급 비밀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이 비밀문서는 놀랍게도 “한국군의 잔인한 처리는 현 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모두 베트남전에서 실전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라며 “마치 광주시민을 외국인처럼 다뤘다"고 적고 있다. 전두환 일당에게 광주 시민은 자국민이 아니라 베트콩 같은 존재였다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군은 미국 용병으로써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리고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미국 용병으로써 베트남에서 제국주의적 폭력을 수행했다.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삼청교육대・서산개척단・국토건설단 피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대체 국가가 나에게 왜 그랬느냐?”는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던진 질문도 똑같았다. “군인들이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두 질문은 하나의 주제에서 나온 두 개의 변주다. 그 주제란 일본 제국주의를 내면화한 군사독재의 자국민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시선이다. 80년 광주학살은 ‘광주’라는 특정 지역민을, 선감학원・형제복지원・삼청교육대・서산개척단・국토건설단은 하층민을 피식민지 민중으로 취급한 사건이다.      


국가 시스템의 정상적인 작동의 결과

미셸 푸코에 따르면 감금제도가 생긴 것은 부르주아 시대의 도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감금제도를 비생산적인 자들을 격리시켜 생산성을 갖춘 경제적 인간으로 교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은 이런 설명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 시설의 목적은 부랑인들을 경제적 인간으로 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 출신자들 대부분이 거기를 나온 이후에도 사회로 온전히 복귀하지 못하고 교도소를 전전하거나, 부랑인으로 살아갔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그냥 노동 착취였을 뿐이다. 

1987년 한 정의로운 검사가 형제복지원을 급습했을 때, 원장 박인근의 방에 있던 대형금고에서는 한화 20억 원을 비롯 달러와 엔화가 가득했다. 모두 노동 착취, 정부 지원금과 후원금 횡령에서 나온 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근은 2년 6개월이라는 가벼운 형량을 받는 데 그쳤다. 정치권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016년 사망할 때까지 1000억원대 자산가로 살았고, 지금은 그 재산을 자식들이 물려받았다. 착취와 횡령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에서의 노동 착취는 단순한 착취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봐야 한다. 경제적 이윤만 생각하면 작업의 능률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은 그러지 않았다. 이 책에는 리어카도 없이 연탄을 나르게 했다, 굴 캐는 작업을 하는 데 한겨울에 고무신만 신고 들어가게 했다, 소 먹일 풀을 베는 데 낫조차 주지 않았다는 식의 증언들이 넘쳐난다. 또한 노동 착취만 생각하면, 노역자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너무 쉽게 원생들을 죽였다.

리어카나 낫은 당시 시골에서도 흔한 물건이었고, 값도 비싸지 않았다. 이런 도구도 지급하지 않은 채로 강제 노역에 내몰고,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다고 모진 박해를 가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그것을 ‘쓸모없는 잔혹함’ 혹은 ‘쓸모없는 학대’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굴욕감과 자기혐오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자국민이 아니라,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 국가에게나 생길 법한 일이다.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 문제는 우리가 과연 온전한 시민권을 갖고 있는지를 묻게 한다. 시민권은 근대 국가 성립의 핵심 요소다. 국민이 시민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역시 온전한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국가의 정상적인 시스템이 그(선감학원 피해자)의 유년기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다.” 이런 말은 자칫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 문제를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벌어진, 예외적인 일로 여겨지게 한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오히려 반대의 생각이 들었다. 국가 시스템이 오히려 제대로 작동해서 생긴 문제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 문제는 시민권도 주어지지 않은 온전하지 못한 국가, 일제 식민지의 경험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국가,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을 내면화한 자들이 지배하는 국가 시스템이 매우 정상적이고 원활하게 작동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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