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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Nov 12. 2020

비인간적 시대에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

인간적인 것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가?’부터 논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할 때, 주로 좋은 것을 떠올린다. 타인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는 것, 따뜻한 배려와 친절, 숭고한 희생, 사랑, 지성, 드높은 이상, 고매한 철학, 예술적 감수성 등. 그러나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지를 명시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행동이 본질적으로 인간적이고, 어떤 행동이 본질적으로 비인간적이라고 구분할 기준이 될 본질이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본능보다 문화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는다. 인간도 동물인 이상 본능이라는 것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본능 역시 문화에 크게 좌우된다. 문화 자체가 인간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다. 

전체적으로 보면, 모든 문명적・문화적 행동은 모두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특질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이 가진 모든 문화와 문명은 좋은 것인가? 흔히는 ‘그렇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를 테면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다른 종이나 자신과 같은 종을 대량학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한다. 또한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제 살 파먹기 식의 환경오염을 자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한다. 악은 각별히 인간적인 현상이다. 짐승은 악할 수 없다. 짐승은 본질적으로 생존 욕구에 이바지하는 타고난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그친다. 

인간의 행동은 늘 짐승 이상의 결과를 낳는다. 잔혹성에 있어서도 인간을 따를 동물은 없다. 조선시대의 거열형(車裂刑,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묶어 끌어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같은 형벌이나 일제시대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생체실험, 우리나라 군사독재 시절의 참혹한 고문을 떠올려보라. 동물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런 만큼 ‘인간적인 것’을 선의 대명사로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이 인간에 대해 기록한다면 ‘인간적인 것’을 악의 대명사로 쓰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더욱 인간적이 되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맞다. 더욱 ‘자기답게’ 되려고 노력하는 존재는 지구상에 인간 밖에 없다. 동물들은 더욱 ‘동물적’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사자는 더욱 사자답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인간은 왜 ‘더욱 인간적’이 되려고 노력할까? 인간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한에서 인간은 인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것’ 안에 ‘비인간적인 것(악한 인간적 특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든 악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더욱 인간적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고매하고 선하고 이상적인 특성을 ‘인간적인 것’으로 상정하고ー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것의 개념이다.ー그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좀 더 파고 들어가면, ‘인간적인 것’ 안에는 선과 악이 모두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진폭은 매우 크다. 인간은 매우 도덕적이고 훌륭한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야만적 존재로 전락할 수도 있다. 두 가능성이 모두 열려 있는 것이 인간이다. 

좀 더 부연하면, ‘인간적인 것’만큼 오염되기 쉬운 말도 없다. 예를 들어 어떤 건설업자가 건설 인허가를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접대와 뇌물을 제공하면서 “서로 이렇게 도우며 사는 것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허허.” 할 때 ‘인간적인 것’은 부정부패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된다. 혹은 직장 상사가 부하 여직원을 성추행하면서 “나 오늘 슬프다. 인간적으로 오늘은 네가 나 좀 위로해줘라.” 한다면? ‘인간적인 것’이 성추행에 동원되는 꼴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는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독가스를 이용해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그것이 굶겨 죽이는 것보다 신속하고 고통이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나치는 살인이라는 말 대신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렇게 대량학살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이 ‘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매사에 완벽하고 철저해 보이는 사람이 어떤 일에 있어서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오히려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가 있다. 뭔가 어설픈 구석이 있는 것이 오히려 매력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일리는 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닌 이상, 언제라도 실수를 할 수 있고, 실수를 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심지어는 자살도 ‘인간적’이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상투적 표현은 죽음까지도 자기 존엄의 볼모로 잡곤 하는 인간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 외에도 나태, 이기심, 과욕, 철없음, 불안, 분노, 우울, 자기 과시도 얼마든지 ‘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좋은 것만이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비인간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 문화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고 있다. 사회가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자본의 논리는 우리의 삶 전반에 관철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사유에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이 현금 가치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기심, 탐욕, 부의 전체주의적 지배, 현금 가치 중심의 사고는 모두 비인간적이다. 그 뿐인가. 자본주의 경제가 추구하는 분업, 대량생산-대량소비 시스템 역시 비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인간적인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문화가 그렇다. 각종 경조사에 참석할 때, 흔히 사람들은 친소관계를 돈으로 환산한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상주가 된 친구와 나의 우정이 5만 원짜리인지, 10만 원짜리인지를 계산하며 부조금을 낸다. 가족 관계라고 예외일까? 집이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자식들이 부모의 유산 상속을 놓고 다투는 경우가 많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늙은 부모의 병원비와 병수발을 두고 형제 간 의(義)가 상한다. 흔히 가족은 혈연집단이므로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돌아보면,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로 자본의 논리는 우리의 일상을 견고하게 지배하고 있다. 

지금은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병폐가 추가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에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으며, 그 결과 전대미문의 경제 양극화에 따른 다양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 양극화는 단지 부의 편중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양극화는 사회 전반의 제도・문화가 슈퍼부자들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며, 어느 한쪽으로 부가 쏠린다는 것은 그쪽의 제도・문화적 결정권(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제 양극화에 따른 다양한 부작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 하는 ‘수저론’이다. 이것은 단순한 풍자나 비유가 아니다. 이것은 계급상승의 사다리가 거의 완전히 끊어진 상황에서 나온 말로, 우리 사회가 신분제 사회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 SK 재벌 2세 최철원의 맷값 폭행 사건, 2014년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갑질 사건들은 ‘계급의 신분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신분제 사회에서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취급해도 된다. 호되게 모욕을 해도 되고, 부당하게 착취를 해도 되며, (성)폭행이나 성희롱을 해도 된다. 그래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따지거나 대들 수 없다.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에 만연한, 약자에 대한 혐오도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다. 계급 이동이 원활한 시대, 사람들은 노력해서 더 높은 계급이 되고자 하는 ‘상향 경쟁’에 몰두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계급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는 아랫사람을 모욕하고 구박하는 ‘하향 경쟁’에 몰두함으로써 자기 서열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러한 혐오문화의 확산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단연 기득권 세력이다. 피지배계급의 상호 혐오가 확산될수록 기득권 세력은 신자유주의가 유발한 심각한 사회문제들ー높은 실업률, 사회 양극화, 빈곤, 환경오염 등ー에 대한 책임을 면할 뿐 아니라, 그 갈등을 이용해 피지배계급을 분할 통치하기 좋다. 그래서 스스로가 인종 차별, 여성 차별, 계급 차별 같은 혐오 발언을 생산하고, 그 확산을 방조한다.    

  

디지털 시대의 비인간화

삼성 광고 시리즈 중에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것이 있다. 내용은 이런 식이다. 아이가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가서 가재도 잡고, 헤엄도 치고 논다. 신나게 노는 것은 좋은데, 엄마가 보고 싶다. 그때 노트북으로 엄마와 화상 통화가 연결된다. ‘코에 왕모기 물렸다’며 어리광을 피우는 아들. ‘엄마가 호~ 해줄게’ 하는 엄마. 그리고 떠오르는 자막. ‘마음까지 이어주는 디지털 세상. 또 하나의 가족 삼성.’ 

이 광고는 디지털이 얼마나 인간적인 것에 복무하는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디지털이 본래 인간적인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광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광고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광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자체가 디지털의 비인간성을 반증한다. 사람들은 흔히 IT 제품들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고립감과 소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실제로 수백명의 트친(트위터 친구)나 페이스북 팔로워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작 자신이 아프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 달려와 줄 친구 한 두 명을 갖지 못한 경우가 주변에 적지 않다. 

IT 기기들은 먼 거리에서도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흔히 좋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도 단점이 있다. IT 기기가 먼 거리에서도 소통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IT 기기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먼 거리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된다. 극단적인 예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동료와 메신저로 대화하는 직장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메신저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사람과 사람의 정서적 거리는 멀어지게 된다. IT 기기들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기보다 ‘끼어든다’고 보는 게 맞다. IT 기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대면접촉의 기회를 줄인다. IT 혁명 후, 사람들은 예전 같으면 만나서 해결해야 할 일도 IT 기기를 통한 간접 접촉으로 해결한다. 

IT 기기의 폐해는 일반 가정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가족들은 한 집안에 모여 있기는 하지만,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스마트 폰을 하느라 서로 대화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다. 어릴 때부터 기계를 통한 소통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대면접촉을 부담스러워하고, 어색해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전화통화도 부담스러워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대부분의 일을 문자로 해결하려 한다. 전화통화보다는 문자가 ‘간접적’이고, 그래서 마음의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대면접촉을 힘겨워 하는 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커뮤니케이션 장애 증후군’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커뮤니케이션 IT 기기들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고 있다. 

우리는 직접 대면해 대화할 때 서로 풍부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말 뿐 아니라, 표정, 안색, 손짓, 자세, 태도, 호흡 등 모든 것이 소통의 자원이 된다. 사람은 풍부한 교감 속에서 인간관계를 일궈나가고, 그 안에서 정서적 안정과 행복감을 얻는다. 그러나 IT 기기를 통한 소통은 이 모든 것을 소거시키고, 앙상한 말과 문자의 메시지만 전달할 뿐이다. IT 기기를 통한 소통이 교감의 질,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인들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수많은 정보통신 매체와 수단으로 중무장하고 있으면서도, 인간관계가 빈약해지는 이유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만 년 전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간은 타인과 세계에 직접 접촉하고, 그를 통해 정서적 풍요로움과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삶은 어떠한가. 액정화면만 들여다보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경우가 흔하다. 일할 때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퇴근해서도 짬짬이 스마트 폰을 들여다본다. 평생을 액정 화면만 들여다보다 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그로부터 20년도 안 되어 우리 삶은 ‘디지털 전체주의’에 지배당하게 되었다. 우리가 느끼는 비인간성도 그와 더불어 증대되어 왔다.      


인간적으로 살기 혹은 인간적인 사회 만들기

과거는 항상 실제보다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아날로그적 삶이 지금보다 인간적이었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어릴 적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몸을 부딪치며 뛰어놀던 일, 삼촌이 손수 만들어준 연을 날리고 팽이를 돌리던 일,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 좋아하는 소녀에게 설레는 마음으로 밤새 쓰던 연애편지,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놀던 일, 첫사랑이 손수 떠준 목도리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경험은 아무런 매개 없는 직접 접촉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접촉 대상은 타인일 수도 있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일 수도 있으며, 산이나 바다 같은 자연일 수도 있다.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고, 그를 통해 자기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삶의 주체성 회복은 중요한 문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내가 주도적으로 내 삶을 이끌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삶이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들은 많다. 또한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으며, 서로 정을 나눌 수도 있다.

디지털이 요구하는 것은 ‘속도’다. 디지털 기기들은 빠른 생활 속도를 구현하고, 사용자로 하여금 즉각적인 피드백을 요구한다. 특히 스마트 폰은 우리 몸에 찰싹 달라붙어 모든 여유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컴퓨터나 휴대폰 사용 시간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디지털 기기에 대한 통제는 부모의 강요로 달성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 미디어가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공부다. 그 폐해를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하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 역시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앗아가는 주범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 속에 가두어 생존에 급급하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만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웬만큼 먹고 사는 사람들도 언제 도태될지 몰라 불안해하며, 돈 버는 데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자원을 쏟아 붓는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문제는 당연히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행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역시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를 둘러싼 야만적인 정치경제적 조건과 환경을 이해하면,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당장은 신자유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더라도 사유하고 운신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다소 회복하게 된다. 그 정신적 여유가 새롭게 살아가는 힘이 된다. 

공부는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다. 공부는 그 이상의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자기 삶을 용의주도하게 꾸려가는 힘이 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공부는 학교 공부가 아니라 사회 현실에 대한 공부, 사회과학적 공부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아도 인간적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가 그런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지 않다. 공부하지 않으면 속을 수밖에 없도록 사회가 구조화되어 있다. 신영복은 이런 글을 썼다. “나무야 나무야. 우리가 도끼자루가 되지 않으면 도끼는 쓸모가 없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들의 도끼자루로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부하고 깨달아야 한다. 지식인들이 들고 나오는 여러 패러다임 중에 무엇이 진정으로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패러다임인지를 판단하는 것도 각성한 시민의 몫이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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