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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Nov 20. 2020

메멘토 모리, 웰빙 그리고 웰다잉

영화 〈제7의 봉인〉과 책 〈마지막 선물〉

우리가 사는 데 몰두하다 보면 잊기 쉬운 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방안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했다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의 모든 문제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인간은 오만해진다. 

〈제7의 봉인〉은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대표작으로 죽음의 문제를 다룬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은 14세기 중엽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페스트가 창궐한 스웨덴이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는 스웨덴의 한 해변에서 검은 망토에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의 방문을 받는다. 블로크가 누구냐고 묻자 사내가 대답한다. “죽음이다.” ‘죽음’은 오래전부터 네 곁에 있었다고 말한다. 블로크는 ‘죽음'에게 체스 게임을 제안한다. 만일 죽음이 이긴다면 그를 따라 나설 것이요, 기사가 이긴다면 죽음이 물러가야 한다. 

체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블로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신에게 구원 받고자 한다. 그러나 신은 대답이 없다. 오직 죽음만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흑사병에 걸려 고통 속에 죽어간다.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제 몸을 채찍질 하며 회개하라고 외치고, 교회는 엉뚱한 여자를 마녀로 몰아 화형시킨다. 그것은 본 블로크는 “공포에 떠는 인간이 신을 창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광대는 이렇게 노래한다. “명심하라. 어리석은 인간들아! 네 목숨은 실낱 같고 남아 있는 날은 짧도다.” 영화는 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음을 앎으로써 소박하게나마 인생의 의미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요즘 사람들은 ‘웰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웰빙'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웰다잉(Well-Dying)’이다. 오진탁은 〈마지막 선물〉에서 부나 권력 같은 세속적 가치는 죽음의 관점에 비추어보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지 않으면 결코 잘 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모범의 하나로 삼는 죽음은 저명한 자연주의자였던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이다. 니어링의 죽음은 ‘잘 준비된’ 죽음이었다. 

니어링은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해 놓았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면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서 죽기를 바란다. 어떤 의사도 주위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죽음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었으면 한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마시는 것도 끊고자 한다. 나는 죽음이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어떤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고 조용히 죽고 싶다. 주사, 심장충격, 강제급식, 산소주입,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죽어가는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슬픔에 잠길 필요도 없고, 오히려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험, 기쁨과 평화를 갖추고 죽음의 경험을 하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므로, 기쁘게 또 희망찬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 죽음은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 혹은 깨어남이다. 삶의 다양한 전개와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우리는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자신이 쓴대로 실천했다. 그는 죽기 한 달 전―100살이 되기 한 달 전이다―그는 “더 이상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맑은 의식으로 죽음을 맞기 위해 그는 신중하게 죽을 시간과 방법을 선택했다. 음식 섭취를 중단함으로써 서서히, 품위있게, 그리고 평화롭게 육신의 옷을 벗고자 했다. 그는 이 무렵 “기쁘게 살았으니 기쁘게 죽으리라.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떠난다”는 말을 즐겨했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아내 헬렌은 스코트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은 소리로 헬렌은 아메리카 토착민의 노래를 읊조렸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마음에 여름날의 따뜻함을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게 있으리라.” 헬렌이 그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무엇이든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몸이 가도록 그냥 두세요. 썰물처럼 흘러가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당신 몫을 다했구요.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그는 자기 육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점점 약하게 숨을 쉬더니, 마치 마른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숨을 멈추었다. 그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다는 듯 “좋-아”하면서 마지막 숨을 쉬고 떠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낯설고 차가운 병실에 누워, 낯선 의사와 간호사들의 부산함 속에서 황망히 죽는 것과 비교하면 그의 죽음은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웠다. 

삶은 결국 죽음으로 완성된다. 잘 죽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의 완성이다. 평소 건강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삶도 다른 사람과 다르다. 그런 사람은 부평초처럼 살다 황망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다 가게 된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곧 삶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삶과 건강한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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