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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31. 2020

돈과 도리 사이

지난여름이었다. 출근길에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 앞차가 빨간 신호에 정지하기에 나도 브레이크를 밟았다. 브레이크를 밟고는 조수석에 놓아둔 가방을 열었다. 스마트폰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뿔싸!’ 발이 브레이크에서 살짝 떨어진 모양이다. 앞차를 박았다. 사실 박았다는 표현보다는 ‘닿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놀이공원에 가서 범퍼카를 타도 그보다는 세게 박는다.     

상대방 운전자도 나도 차에서 내렸다. 내가 상대방 차 뒷 범퍼를 살폈다. 별 다른 피해가 없었다. 상대편 운전자는 40대 여성이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보였다. “경미 한 것 같으니, 나중에 연락드릴게요.”하고는 상대 운전자가 먼저 자기 차로 돌아갔다. 학교에 와서 수업 준비하고 있는데, 상대 운전자의 남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내가 많이 놀란 것 같아서 병원에 가겠으니 보험 접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문경에서 근무할 때는 한 번도 접촉 사고를 당하거나 낸 적이 없다. 차량이 적어서 접촉 사고가 날만한 상황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미에 오고 나서는 간혹 접촉 사고가 났다. 몇 번은 내가 박았고, 몇 번은 상대가 날 박았다. 고물차를 타던 시절에는 내 차를 누가 박아도, 상대 운전자를 그냥 돌려보냈다. 차를 새로 사고 나서는 도색 비용 정도만 요구했다. 그러나 내가 박았을 때는 달랐다. 간혹 나처럼 실제 손해에 대한 보상만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차량 수리비에 병원비까지 요구했다.     

돈과 도리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선택한다. 도리는 지켜봐야 당장의 이익이 없는 반면, 돈을 선택하면 당장 수중에 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상당히 실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가벼운 접촉사고의 경우도 대인관련 보상을 받게 되면 적어도 80만 원 정도의 돈이 생긴다. 돈에 민감한 사람들은 그 유혹에 저항하기 힘든 모양이다.     

도리보다 돈을 선택하는 게 실리적으로 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성서는 “뿌린 대로 거둔다.”고 말했다. 불경은 “자기 지어서 자기가 받는다.”고 설파한다. 자기가 행한 대로 업을 짓고, 그 업에 대한 응보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동양고전 맹자에는 ‘출이반이’(出爾反爾)라는 사자성어가 나오는데, 이는 ‘나에게서 나간 게 결국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선악이나 화복은 다 자기가 자초(自招)하는 일임을 말하는 것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 도리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면 그 응보가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돌아올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세계적인 영적스승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그의 저서 『의식혁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는 매 순간 우리가 무슨 선택을 하는 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우주는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를 떼어내 주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도 반응한다.” 만약 우리의 선택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거짓으로 취한 금전적 이익은 부정적인 응보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성경이나, 불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난 사람들이 겨우 100만 원 정도의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자기 양심을 파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내 양심의 값어치가 겨우 100만원도 안 되는구나!’하며 자괴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난 가끔 사람들에게 서운하다. 난 그들이 좀 더 품위 있었으면 좋겠다. 돈 몇 푼에 자기 양심을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쓴이 

흐르는 강물처럼. 

지적인 사람이고자 노력하지만, 그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 이 글은 글맛 공방의 프로그램을 수강하신 분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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