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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Feb 03. 2021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반전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고?

영화 〈반딧불의 묘〉에 나타난 반전의 논리, 그 허점

영화나 소설을 보면 유독 ‘휴머니즘’을 강조한 것들이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야기’라는 형식이 무엇보다 인간적인 정서, 즉 사랑이나 연민 같은 것에 호소하기 쉬운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을 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고통과 갈등에 공감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말한 설득의 3요소, 로고스(logos, 이성적 판단), 파토스(pathos, 정서적 호소), 에토스(ethos, 인격과 윤리성) 중에서 파토스에 기대는 측면이 큰 것이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의 이런 특성은 자칫 로고스를 훼손하기도 한다. 주인공을 따라 웃고 울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는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반전(反戰) 애니메이션으로 평가받는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의 묘〉가 그렇다. 노사카 아키유키의 동명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이 영화는 2차대전 말, 전쟁고아가 된 남매의 이야기이다. 참전 중인 해군 대령의 자식으로, 엄마와 고베(神戶)에서 살던 세이타(14세)와 세츠코(4세)는 미군의 공습으로 하루아침에 집과 엄마를 잃게 된다. 남매는 할 수없이 먼 친척뻘 되는 아주머니의 집을 찾아가지만, 식량만 축내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다. 

아주머니의 냉대를 피해 방공호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한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는 점점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세이타는 아픈 세츠코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만, 의사는 “영양실조이니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라”고 한다. 그러자 세이타가 절규하듯 말한다. “영양 같은 게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세이타는 생존을 위해, 어린 동생을 위해 도둑질을 하기 시작한다. 감독은 공습경보가 울리면, 집을 버리고 방공호로 대피하는 마을 사람들과 그 틈에 도둑질을 하기 위해 마을로 뛰어드는 세이타를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길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생존의 길이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슬픈 서정적 아우라를 발생시키는 반딧불은 전쟁 통에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세이타와 세츠코를 상징한다. 나아가 반딧불은 전쟁 통에 희생된 ‘모든 힘없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문제는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이 전쟁의 ‘피해자’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이타와 세츠코 뿐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기를 거부한 친척과 마을 어른들도, 심지어 교전 중 전사한 해군 대령 아빠까지도 전쟁이라는 상황이 낳은 희생양으로 그려지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일한 가해자는 ‘미국 폭격기’ 뿐이다. 

게다가 군국주의는 세츠코의 아이덴티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세이타는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시가지를 바라보며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원수를 갚아줄 거야.” 세이타는 어릴 때 본 관함식에서 그 뱃머리에 섰던 아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이런 군가를 부르기도 한다. “지키자. 무찌르자. 바다에 뜬 무쇠의 성이다. 힘이 된다!” 물론 어린 세이타에게 반군국주의적 의식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느냐, 어떤 내러티브를 구성하느냐, 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냐 하는 것은 작가와 감독의 선택사항이다. 

탄탄한 스토리와 뛰어난 서정성, 비극의 사실적 묘사, 특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세츠코의 귀엽고 앙증맞은 캐릭터는 관객의 눈물샘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런 까닭에 영화를 본 후 관객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저것 다 제쳐놓고 전쟁 자체의 비극을 고발하는 순수한 반전영화로써는 수작(秀作)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남매의 비극이 재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은 좀 더 냉철한 이성적 판단이다. 만약 영화가 전쟁 피해자로서의 민중을 부각시키고자 했다면,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정치인들과 군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포함되어야 했다. 그러나 영화 속에는 일체 그런 메시지와 암시가 없다. 

반성이 배제된 반전 이데올로기가 위험한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우익세력은 밖으로는 세계 최초의 원폭 피해국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전범국가로서의 위상을 불식시키고, 안으로는 다시 이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핵무장을 포함한 군사대국화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확산시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위한 반전 이데올로기가 전쟁을 획책하는 군국주의의 기반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반전(反戰)은 좋다. 그러나 일본 민중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 ‘과정에 대한 성찰’이 없는 반전은 위험하다. 우리는 그것을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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