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친구는 장애인입니다. 흔히 말하는 난쟁이, 왜소증을 앓고 있습니다. 신체는 자라지 않고 머리만 성인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생각과 행동은 우리와 같습니다. 처음 그와 친해진 날이 기억납니다. 대학 시절, 저는 수업시간에 늦어 황급히 강의실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수업이 2층에서 진행되니 당연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리라 생각하던 그 아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걸어 올라가지?’라고 생각하며 친구에게 다가가서 부축하려 했습니다.
“야, 그냥 같이만 가자!”
그 아이가 저에게 건넨 첫 한마디였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계단을 올랐습니다.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저를 향해 그 아이가 말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임마!”
그때 친구의 계단 오름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자신에 대한 신뢰와 편견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혼자서 계단을 오르게 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과 실행이 저의 일방적인 동정과 배려를 멈춰 세우고 그와 함께하게 한 것이지요. 저는 그저 옆에서 같이 있어 주기만 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는 자’라고 장애인복지법에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장애인들도 종종 볼 수 있으며, 정부 혹은 사회단체는 이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지속적으로 지원합니다.
그런데 지원과정에 문제가 있습니다. 대다수의 지원이 금전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정부와 단체는 그것이 지원의 끝인 것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기부를 통한 금전적 지원이 끝이 아니라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명확하게 관리 감독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내가 낸 기부금이 누군가의 장학금으로 전달되어 학업을 마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든지, 혹은 시각 장애인 전용 점자기기를 구입하는데 쓰임으로써 그들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든지 하는 과정까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부는 장애인을 돕기 위해 만든 방법이지 기부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장애인 또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며 시민입니다. 그리고 민주시민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할 수행에 있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난 2019년 7월, 사회적 경제 정책포럼에서 ‘파파스윌’(발달장애인 자조모임이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된 단체)의 엄선덕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직업지원도 좋고 지원금도 좋지만, 이들이 지역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게끔 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발언은 장애인을 통해 마을 공동체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직업이나 금전적 지원을 넘어서 장애인을 사회 내부로 수용하는 정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장애인들은 자기 존중감이 높아지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외부의 지원과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해진 이들은 소극적 태도를 고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애인 정책의 최종 목표는 자립하는 시민으로의 전환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정책을 실행해야 합니다.
글쓴이
빵식이.
빵을 좋아하고, 글을 사랑하며, 웃는 세상을 보고 싶은 사람.
* 이 글은 글맛공방의 '시사칼럼 쓰기'를 수강한 분이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