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적 사유 능력과 사람의 깊이

by 글맛공방

프랑스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의 단편 중에 「깊이에의 강요」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여주인공은 화가이다. 그녀는 초대 전시회에서 한 평론가에게서 이런 평가를 받는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그 평론의 영향을 받은 다른 사람들도 그녀의 작품이 ‘깊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여주인공은 ‘나는 왜 깊이가 없을까?’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마침내 자살한다.

이 작품은 ‘깊이를 강요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히 ‘깊이를 추구하는 모든 행위가 폭력이 된다’ 혹은 ‘깊이가 없어도 좋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여주인공을 자살로 몰아가는 것은 깊이가 ‘강요’될 때의 문제, ‘깊이가 없다’라는 말 자체의 모호함과 그런 포괄적인 규정에 깃들기 쉬운 폭력성, 권위있는 사람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대중의 문제 같은 중층적 문제들이지, ‘깊이’에 대한 추구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깊이에 대한 추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으로서 깊이에 대한 추구는 사실상 불가피하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깊이를 갖고 싶어 한다. 그에 대한 욕망은 매우 근원적이다. 우리가 흔히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진다면 가까이 하고픈 생각이 들 것이다. 반대로 만난 지 얼마 안 돼 그 바닥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금방 싫증이 날 것이다.

역사적으로 깊이 있는 인물들은 많았다. 멀리는 소크라테스, 공자, 붓다, 예수 같은 성인들이 있다. 오늘날 이들은 상식이 되어버렸고, 그런 만큼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커다란 정신적 충격과 희열을 주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들의 가르침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의 매력은 그 언행의 ‘깊이’에 있었다.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곤 한다. 그들은 깊이 생각한 후에 몹시 두려운 일을 태연히 일어나게 내버려두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일들, 동물적 본능에 반하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해치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 수양이 잘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보통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인내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남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이 참지 못하는 것을 능히 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인이나 위인전기에 나올법한 사람들만 깊이를 갖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코미디언 배삼룡은 “웃음은 남에게 주고, 슬픔은 내가 갖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가? 단순히 멋진 말이라는 생각을 넘어, 이 말들이 그들의 코미디에 함축된 어떤 깊이를 반영한다고 느끼지 않는가? 그들의 말에는 일정한 깊이가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코미디에도 깊이가 있었다.

그러면 좀 더 평범한 사람은 깊이를 가질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나의 어머니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남의 옷을 만들어주고, 수선해주면서 세 남매를 키워 내셨다. 이십대부터 바느질을 했으니, 근 40년 동안 바느질을 해온 셈이다. 그런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바느질에도 격(格)이 있다. 하수(下手)는 옷을 손님의 몸에 맞춘다. 몸 치수를 잘 재고, 그에 맞추어 옷을 만든다는 말이다. 중수(中手)는 옷을 유행에 맞춘다. 그렇게 해서 촌스럽지 않게 옷을 만든다. 고수(高手)는 손님의 ‘마음’에 맞춘다. 손님의 말투와 분위기, 입고 있는 옷의 특징과 모양을 살펴 직업과 취향 등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옷을 만든다.” 나는 이런 말에도 나름 깊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랜 세월 한 가지 일에 전념해온 장인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직업 철학 같은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중에는 내공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간단히 말해서 ‘인문적 사유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은 내공과 깊이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원천이다. 그것은 고차원적이고 학술적인 의미의 ‘철학’일 수도 있고, ‘인생 철학’일 수도 있으며, ‘직업 철학’이나 ‘경영 철학’일 수도 있다. 공통점은 하나다. 철학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 그 차이가 내공과 깊이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내공과 깊이의 문제는 결국 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인문적 사유능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크다. 인문적 사유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일종의 자가발전 시스템을 갖춘 것과 같다. 무엇을 하든, 어떤 지위에 있든 상관없이 그는 날마다 조금씩 발전할 것이다. 그는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로 살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자장(磁場)처럼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인문적 사유 능력이 없는 지적으로 점점 퇴보하게 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생활의 압력, 집단의 논리, 남들의 말을 그냥 따라가게 된다. 그런 사람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에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그것들은 모두 어디선가 듣거나 본 것을 반복하는 것에 그친다. 그는 자기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구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매력’이 없는 사람이다.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Paul Bourget)는 이런 말을 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려면 인문적 사유 능력을 높여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래된 책 읽기의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