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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em Jan 22. 2021

기능이냐 존재냐

나는 오늘도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

 1900년에 독일에 태어난 성인 에리히프롬의 대표작 중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아주 본질적으로 통찰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소유가 존재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소유가 존재의 목적이 되어 버리고 이것이 사회의 병패를 발생시킨다는 내용이다.


소유가 존재의 목적이 되어버린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연예인 함x원씨를 들 수 있다. 이미 살아가기에 충분한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소유하기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이로 인해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YOLO를 외치며 버는 족족 쓰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밸런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기 위해 돈을 벌면서, 돈을 벌기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포기한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기 일쑤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나는 한국 사회에 더 정확한 표현은 '소유냐 존재냐'보다 '기능이냐 존재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부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고, 돈에 대한 인식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최근에는 인식이 많이 변했지만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주식을 도박이라고 생가하던 금융문맹 국가였고, 나도 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의 말을 조부모에게 자주 듣고 자랐던 기억이 있다.


그에 반해 흔히 이야기하는 '노오력'으로 성공한 사람들, 특히 '사농공상'의 정신을 가진 선비의 나라답게 판사, 검사, 의사, 변호사와 같은 공부 해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높았다. 즉,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이 기능은 안정적이고 평균 이상의 수입과 더불어 사회적 지위가 주요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것이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 이상의 '수치'를 기록하지 못하면,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도록 교육받는다. 수치심은 지극히 자학적인 감정이고, 아픈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즉,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인 이기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수치는 ’비교‘에서 시작되고, 비교는 끝이 없다는 점이다. 언제나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월급, 더 높은 직위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비교우위에 오르려는 사회에서 우리는 언제 행복할 수 있을까?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결국 비교에서 나오는 '우월감'도 수치심도 정신건강에는 좋을게 없는 것이다.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은 이 우월감을 지키기 위해,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이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더 잘 기능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수치를 통한 비교가 '남녀갈등'과 '세대갈등'등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의 본질적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성실한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기능으로 판단한다면, 그건 사람을 물건으로 보는 것일까 사람으로 보는 것일까.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신발이 얼마나 가볍고 튼튼한지 물건을 기능으로 판단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만든 공산품은 기능에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이게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게 맞는 것일까. 얼마나 버는지, 얼마나 외적으로 뛰어난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물건 취급받으며 결국에는 폐기 처분되어야 하는지.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사회인지.


 정말 우리의 행복한 삶에 필요한 건 우월감이 아니라 나를 존재 자체로 사랑해주고 존중해주는 주변인일 것이다. 비교하고 판단하지 않으며 나를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2007년 까지만 하더라도 핸드폰은 그저 전화나 문자만 할 수 있는 기계에서 이제는 하나의 컴퓨터가 되었고, 3년 전만 해도 아직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자율주행의 상용화를 넘어선 대중화가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이제는 2022년을 상상하는 게 아예 힘들 정도로 과학의 발전은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인간이 가진 유전자는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고 삶을 나누고 싶어 한다. 만약 우리에게 무한한 통장잔고가 있다면, 당신은 외딴섬에서 혼자 명품을 진열해 놓고 호위 호식하며 평생을 살고 싶을까?


 과학의 발전의 방향성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능은 점점 더 기계들이 할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데 필요한 기능을 기계가 대체해 준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삶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가 정말 교육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공감해주고, 다른 사람을 존재 자체로 사랑해주는 기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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