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아닌 머리로.
사람은 깨어있는 시간 중 80%를 타인과 대화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대화라는 것이 꼭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닌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 까지 포함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시시콜콜한 농담부터, 사는 이야기, 관심사 등등..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의 다른 사람과의 시간은 거의 대부분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다른 사람과 그렇게 많은 대화를 해도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 관심을 갖고 듣지 않은 것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 ‘경청’이라는 책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의 이름은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을 모티브로 한 이토벤이다. 주인공은 회사에서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고 회사의 입장만 고집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려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하고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하자 독선적인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경청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사실 청각 기능과 듣기 능력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육체적 청각 기능에 이상이 없으면, 누구에게나 듣기 능력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요.”
잘 듣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많은 부분 언어를 사용해 생각을 표현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이 아닌, 들으며 상대방의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아닐까. 들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 말이다.
우리에겐 교정반사 본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상대방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쳐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 일 뿐입니다. 생각에 정답은 없다. 다른 생각과, 다른 표현 방법이 있을 뿐이다. 결정과 행동에 따른 만족도, 행복도, 후회도, 고민도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잘 들어주고 판단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것은, 상대방을 존재 자체로 존중해 주는 것의 시작일 것이다. 듣기의 존중이 선행될 때 우리는 타인의 솔직한 마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잘 듣는다면, 잘 질문할 수 있다. 잘 질문할 수 있다면, 상대방의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알고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잘 듣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며, 잘 듣고 편견 없이 “그건 왜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순수하게 질문을 던져 주는 것이다.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상대방을 궁금해하고 찾아주려 하는 것. 그것이 잘 듣고 잘 질문하는 것일 것이다.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유한하니까. 정말 소중한 사람들, 알고 싶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질문해 주는 것. 이것조차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돕고 싶은 생각에 왜 이야기하지 않냐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대방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언제든 네 곁에 있겠다.’는 마음을 보내주는 것. 그리고 가만히 들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존중의 시작이며 최고의 듣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