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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em Apr 22. 2023

[나는기레기다] 기사 한편에 세상은 담기지 않는다

비판할 자격

“잘못한 부분은 많이 꾸짖어주시고, 지적해 주세요”    

 

기자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꾸짖고 지적할 자격이 있는가. 이 자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생긴 건가. 그렇다면 기자란 무엇인가.     


기자가 ‘명문대를 나와 높은 임금을 받으며 깨어있는 지성인’을 상징하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기자님’이라는 존칭보다 ‘기레기’는 멸칭이 더 익숙한 시대다. 몇몇 결혼정보회사에선 기자를 전문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지만, 기자는 로스쿨을 졸업해야 하거나 의대를 나와 시험을 봐야 하는 판검사나 의사보단 4년제 대학 나온 평범한 직장인과 훨씬 비슷하다.      


또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언론사는 엄청나게 증식했고, 과거처럼 언론고시를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기자가 될 수 있게 됐다. 미디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전달매체가 신문이나 방송에서 인터넷으로 옮겨 갔고, 블로그에 기사를 쓰며 스스로를 기자라고 지칭해도 관념적으로 아무런 오류가 없어졌다. 또 홈페이지 하나 있으면 ‘언론사 국장’도 될 수 있다. 전달자의 역할을 하는 기자는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셈이다.




설사 명문대를 나와 언론고시라는 관문을 통과해 높은 임금을 받는 깨어있는 지성인이라면 누군가를 비판할 자격이 생기는가. 그렇다면 깨어있는 지성인들이 모여있다는 언론계는 왜 지금 이 모양 이 꼴인가.


미디어는 전달자지, 창조자나 심판자가 아니다. 감시자로서 비판과 지적이 언론의 존재이유지만,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겸손해야 한다. 한 사람이 무한의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며, 지식도 계속해서 갱신되지 않는가. 과거 언론이 잘못된 보도를 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또한 대부분의 기사는 제보를 통해 만들어진다. 직접 발로 뛰어 취재를 하더라도,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들은 것’이 기사의 토대가 된다. 누군가의 편집된 기억을 듣고 또다시 편집하는 건데, 이런 과정에서 모든 진실(Truth)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는다. 언론이 보여주는 건 실제가 아니라 유사환경에 불과하며, 완벽하게 사실적이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뉴스란 당초 존재할 수 없다.


셜록홈즈에 나온 "명확한 사실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는 말처럼, 어떤 사건이나 사안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사건이나 사안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거다. 그렇기에 기자라는, 언론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고 하는 건 오만한 생각이다.


그럼에도 다수의 기자는 스스로 취재한 사실(Fact)을 기반으로 쉽게 비판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리라.




“뉴스와 진실은 동일하지 않다. 뉴스의 기능은 사건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진실의 기능은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내 그 사실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시키는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이 자신의 저서 ‘여론’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현시대의 언론과 기자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는가. 당신의 비판은 정말 합리적이라고 할 순 있는가?


1000자 남짓한 기사 한 꼭지에 모든 진실을 담을 순 없다. 아무리 잘 쓰더라도, 기사 한편에 세상은 모두 담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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