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Nan)의 속삭임, 왓 푸민의 영원한 미소

제1장: 시간도 쉬어가는 도시, ‘난(Nan, น่าน)’으로의 초대

by 태국학연구소

1. 기억이 데려간 곳

기억은 가끔 우리를 엉뚱한 좌표로 데려다 놓는다. 나에게 ‘난(Nan, น่าน)’이 그렇다. 지도를 펴면 태국 북부의 끝자락, 라오스와 어깨를 맞댄 낯선 지명이지만,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1989년의 치앙마이로 되돌아 간다.

그해 처음 마주했던 치앙마이는 지금처럼 화려한 카페와 교통체증으로 가득한 도시가 아니었다. 잘 빗질된 마당처럼 정갈한 거리, 지나가는 이방인에게 수줍게 건네던 미소, 무엇보다 인간의 걸음과 어긋나지 않던 ‘시간의 속도’. 도시가 커지고 세련되어질수록, 나는 그 느린 북부의 원형을 마음속에서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난의 골목에서 그 잃어버린 30년의 시간을 다시 만난다.

난은 참으로 ‘대견한’ 도시다. 밀려드는 자본과 현대화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들의 색을 촌스럽다 여기지 않고, 묵묵히 갈고 닦아 온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열 번이 넘게 이곳을 찾았지만, 매번 비슷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고집 덕분일 것이다. 이 도시는 변하지 않으려 애쓴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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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야를 거스르지 않는 평온, 난 강(Nan River, แม่น้ำน่าน)의 풍경

해 질 녘, 나는 숙소를 나서 난 강변으로 향한다. 이곳의 강은 위용을 뽐내지 않는다. 크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적당한 폭의 물줄기가 낮은 강 풀을 스치며 흐른다. 강변을 따라 드문드문 서 있는 야자나무 몇 그루가 이곳이 열대의 땅임을 알려줄 뿐, 강 너머의 낮은 건물들은 우리 기억 속 시골 마을처럼 편안하게 엎드려 있다.

나는 이 강변을 ‘슬렁슬렁’ 걷는 것을 좋아한다. 대도시에서 굳어 있던 감각들이 난의 강바람을 맞으며 하나 둘 제자리를 찾는다. 이곳의 산책에는 시야를 거스르는 것이 없다. 높은 빌딩도, 번쩍이는 네온도 없다.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하늘과 그 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강물, 그리고 내 발자국 소리만이 남는다.

걷다 보면 저녁을 준비하거나 낚싯대를 드리운 현지인들과 가끔 눈이 마주친다. 그들은 말을 걸지 않는다. 대신, 자신들의 평온한 일상 속에 이방인이 잠시 섞여 드는 것을 조용히 허락한다. 그 무심한 환대 속에서 나는 비로소 마음의 수평선을 다시 맞춘다.


3. 박물관을 닮은 사람들, 그들이 사는 세상

난 국립박물관에 들어서면 기묘한 일체감을 느낀다. 보통의 박물관이 유물과 관람객 사이의 차가운 거리를 유지한다면, 이곳은 누군가의 정갈한 안방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그곳의 직원들은 단순히 전시물을 관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공간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나직한 말씨와 단정한 옷 매무새, 서두르지 않는 몸짓. 그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유물의 품격을 그대로 닮아 있다. 어느 날, 박물관 내부를 카메라에 담고 있던 나에게 한 직원이 다가왔다. 제재를 하려는 걸까 싶어 멈칫했지만,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서 찍으면 이 유물의 문양이 가장 잘 보입니다. 플래시만 켜지 않는다면 마음껏 담아가세요."

그는 촬영 포인트를 하나하나 짚어주며 내가 가장 예쁜 장면을 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월급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직원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집의 보물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집주인 같았다. '파퉁'을 닮은 치마를 입고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안정감은, 박물관 유리 케이스 안의 유물보다 더 빛나는 난의 살아있는 자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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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길 위에 놓인 배려, 도시의 고집

박물관 밖으로 나와 다시 거리로 나서도 그 온기는 이어진다. 길가에 군데군데 놓인 벤치들은 마치 나와 같은 여행자의 고단함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적절한 자리에 놓여 있다. "잠시 앉아 쉬어 가도 괜찮다"고 건네는 도시의 소리 없는 배려다.

가로등 하나에도 난의 전통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현대식 간판 대신 마을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나지막한 표지판들이 길을 안내한다. 너무 퓨전화 되지 않아 식재료 본연의 깊은 맛이 살아있는 전통 음식들, 그리고 세월의 결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오늘을 살아가는 전통 주택들.

이 모든 풍경 속에서 나는 난이 가진 '대견한 고집'을 본다. 자본의 논리에 밀려 정체성을 팔아 치우는 대신, 조금 느리더라도 자신들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이 정갈하고도 단단한 고집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1989년의 치앙마이를, 그리고 잃어버렸던 나의 평온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이 평온한 마음을 안고, 나는 도시의 심장이자 거대한 배를 닮은 왓 푸민(Wat Phumin, วัดภูมินทร์) 사원의 문을 열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