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의 또 다른 기억
“태국 깊은 산속에 식인종이 산대.”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그 소문이 꽤나 진지했습니다.
혈기 왕성하던 시절, 나는 친구들과 함께 생닭 한 마리를 짊어지고 탐사에 나섰습니다.
진짜 식인종이 있다면 닭이라도 던져주고 도망칠 심산이었죠.
하지만 태국 북부 난(Nan, น่าน) 주의 울창한 밀림 속에서 우리가 마주친 건,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라 한글 티셔츠를 입은 아주 작고 수줍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태국에서 가장 신비로운 소수 민족이라 불리는 ‘므라브리’(Mlabri) 족이었습니다.
태국어로는 ‘피떵르앙’(ผีตองเหลือง, Phi Tong Luang), 즉 ‘노란 잎의 유령’이라 불리는 이들이죠.
거처로 삼는 바나나 잎이 노랗게 시들 때쯤 유령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처음 그들을 마주했을 때의 긴장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얇고 가는 낫 같은 칼과 작대기를 든 채, 숲길을 헤치며 무언가 끊임없이 신호 같은 소리를 내던 그들.
혹시 나쁜 신호는 아닐까 덜컥 겁이 났지만,
우리가 건넨 생닭을 본 그들은 이내 우리를 자신들의 마을로 이끌었습니다.
그곳에서 마주한 삶은 소문보다 훨씬 따뜻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져간 닭을 정성껏 손질해 태국 북부식 고기 요리인 ‘랍’(ลาบ)을 만들고,
무언가를 정성껏 끓여 내왔습니다.
위생 상태는 현대인의 기준과 멀었지만, 갓 끓여낸 음식은 의외로 꽤 맛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던 그들의 ‘선한 눈빛’*을 마주하니,
식인종이라는 괴담이 얼마나 무지한 편견이었는지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은 나를 위해 나무 위에 특별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숲 바닥의 위험으로부터 손님을 보호하려는 그들만의 ‘VIP실’이었죠.
다행히 짊어지고 간 침낭 속에 들어가 누우니 산속의 찬 공기도 거뜬했습니다.
벌레 소리에 잠을 조금 설치긴 했지만,
침낭 안의 온기와 그들이 나누어 준 음식의 정성 덕분에
그 밤은 공포가 아닌 포근한 추억으로 채워졌습니다.
90년대 문명의 상징인 멜라민 그릇과 숟가락,
그리고 한국에서 건너온 구호 물품인 헌 티셔츠를 입고
대나무 바구니를 짜는 그들의 모습은
전통과 현대가 묘하게 섞인 비현실적인 장면 같았습니다.
이별의 순간, 우리는 지갑과 여권, 카메라만 빼고 모든 물건을 내어주었습니다.
험한 숲을 뚫고 우리가 아는 길까지 정성껏 안내해 준 그들에게 전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였습니다.
특히 내가 덮고 잤던 침낭을 선물로 받았을 때, 아이처럼 기뻐하던 그들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유령’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괴담 속 ‘식인종’이었던 사람들.
하지만 내가 만난 므라브리족은 숲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길 잃은 이방인에게 기꺼이 따뜻한 불씨와 잠자리를 나누어 주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가이드’였습니다.
가진 것을 다 주고 돌아오는 길,
배낭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그들이 나누어 준 인류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아름다웠던,
진짜 세상과 마주한 모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