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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수리 감성돈 Apr 25. 2020

음식물이 상했다. 내 마음도 상했다.

백수된 지 이제 달이 바뀌면 5개월 차가 된다. 지난번 집에 물건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나서 대폭 정리를 했었다. 안 입는 옷들, 책, 잡화를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고, 쓰임의 가치가 없어진 것들은 종량제 봉투 50L 짜리를 구입하여 여러번 버렸다. 냉장고도 냉동실, 냉장실은 모두 비우고 청소까지 해두었다. 이제 정말 음식물을 남기지 않겠다고. 필요 없는 물건은 집안에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어제 삼겹살을 먹으려고 고기 상태를 보다가 갈변한 것을 보았다. 당장 먹으려면 냉장에 넣어두고, 오래 두고 먹으려면 냉동실에 넣어놨어야 하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먹으리라는 생각에 삼겹살을 냉장에 넣어두고 그걸 잊고 있었다. 그리고 삼겹살과 함께 먹으려고 쌈채소를 산 것들도 먹기 힘든 상태로 시들어 버렸다. 과일도 적당량 사두고 소분해서 매일 먹으려고 했는데, 처음 몇 번은 먹다가 나중에는 과일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음식물이 상했고, 난 마음이 상했다.     


백수가 아니였을때는 내가 바빠서, 아니면 이 음식들이 상해도 다시 구입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별 생각이 없었는데, 백수가 되고, 맨날 집에만 있고 눈 뜨면 냉장고가 보이는데, 그 냉장고 안에 음식물 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슬프게 했다. 왜 그랬지. 왜 그랬니. 풍족하게 무엇을 사들일 상황도 아니고, 달달이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무슨 자만심으로 이 음식들을 상하게 방치하였을까. 음식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진짜 내가 이렇게 찌질해졌나 싶지만 찔끔 눈물이 났다. 정말로 음식물들에게 미안했다. 깊은 죄책감이 든다. 이럴거면 다른 소비자들이 소비하게 놔둘걸. 난 왜 내 욕심에 장바구니에 넣었고, 그것을 제때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되는 상황이 온 것인지. 내 자신이 한심했다. 정말 미안하다. 상한 음식물들을 처리하고 빈 냉장고를 바라본다. 먹고 살기 위해. 나는 또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 그 채움과 비움이 온전하게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직 자신이 없다. 아직도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난 느린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느린 사람, 그냥 편하게 말하면 게으른 사람. 조금 느리지만, 또 시행착오도 자주 겪지만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잠시 음식물에 대한 묵념... 이라기보다는 멍 때리기에 가까운 그런 것들을 오늘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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