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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23. 2019

‘살찐 고양이’ 앞에만
생선을 쌓는 시대

‘살찐 고양이’ 앞에만 생선을 쌓는 시대    

 

단추가 곧 터질 듯한 턱시도를 입고 상대를 조롱하듯 내려다보며 시가를 물고 있는 고양이. 

경제면 기사를 보다보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이 풍자만화 속 고양이는 탐욕으로 가득한 금융 자본가를 나타낸다. 

이 고양이가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920년대 저널리스트 프랭크 켄트의 저서 <정치적 행태(Political Behavior)>에서부터다. 그의 책에 ‘fat cat’, 즉 ‘살찐 고양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이 용어는 ‘정치 헌금자’를 의미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의미가 더해지고 그들의 속성을 빗대는 말로 아이콘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배부른 자본가, 특권과 혜택을 입는 부자, 많은 돈을 챙기는 금융가 등으로 그 의미를 확장했다.     


‘살찐 고양이’의 등장은 돈에 의해 지배되고 돈에 의해 계층이 구분되는 세상이 불러들였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지나오며 조금씩 보이던 흐름이 결국 지금은 돈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시대로 이끌어버렸다. 


돈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다.

인간 역사의 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세계 역사의 흐름마저 바꿔놓았다. 메디치가로 대표되는 초기 은행의 지원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었고,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채권 시장은 대영제국이 가능하게 했다.

프랑스 혁명도 돈의 가치가 추락하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1, 2세계 전쟁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돈의 흐름을 정하는 이들이 바로 ‘살찐 고양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돈은 곧 신이었고 축복이었다.      

그렇다면 돈은 무엇일까? 왜 이렇게 큰 힘을 갖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돈이란 교환을 위한 증서에 불과하다. 유로화 이전, 영국의 20파운드 지폐를 보면 ‘고객의 요구 시 20파운드를 지불할 것을 약속합니다’ 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돈이란 바로 지불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그 약속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미국의 10달러 짜리 지폐를 보면 신이 등장한다. ‘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문구가 그것이다.

여기서 ‘믿는다’는 의미는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다.  

현대사회는 옛날처럼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지 않는다. 오로지 신용만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결국 돈이란 믿음인 것이다. 우리가 돈을 주고받는 것은 그것을 발행한 은행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이란 상호간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신용’을 뜻하는 단어 ‘Credit'은 라틴어 'Credo'에서 파생된 말이다. 

‘나는 믿는다’라는 뜻이다.      


초기의 신뢰의 형태는 어음과 같은 증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잠시 램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상인 니콜라스 루츠>란 작품을 보자. 

램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상인 니콜라스 루츠>

이 작품은 램브란트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된 중요한 작품이다. 화가는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그런데 이 초상화는 당시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자본 권력가의 등장을 얘기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전까지의 초상화는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이 시기에 새로이 등장한 계급이 상업자본가 그룹이다. 이 시기는 향신료 등의 수요가 커지고,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무역이 활발해지던 시기였다. 이 기회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냈다. 무역을 위한 배를 소유한 사람,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은 사람, 그리고 이들이 항해할 수 있도록 자본을 대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에서 모델이 들고 있는 쪽지는 오늘날 신용 거래의 근간이 된 어음이다. 이 시기 어음은 상거래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또한 자신의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음이 등장하면서 동시에 빚이라는 개념이 확산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신용에 바탕을 둔 빚이란 개념이다. 사실 빚이란 순환의 한 과정이지 실재하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이 빚 때문에 경제제도 속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엄밀히 말해 유통되는 모든 돈은 결코 실재 발행된 돈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돈은 빚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장기국채나, 가계대출, 신용카드로부터 만들어진 돈은 존재하지 않다가 갑자기 실체를 갖는다. 

이자도 마찬가지다. 

그 빚은 압박감을 만들고 우리를 결국 금융자본제도의 노예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돈은 어디로 갈까? 

바로 극소수의 거대자본가그룹이다. 그들에게 돈이 집중되는 정도에 따라 사람들의 파산도 정비례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빚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없다. 국가도 결국 이러한 시스템에 따라 부도사태가 발생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이것은 자본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수십억 인구의 생존이 걸려있다. 이 게임으로 아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가족은 붕괴한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빚’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제도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듀캇은 안토니오의 보증으로 악덕 대부업자 샤일록에게서 돈을 빌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토니오는 듀캇이 무역을 통한 차익으로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돈을 갚을 수 없을 때에는 자기의 살 1파운드를 제공한다는 무리한 증서를 써준다. 그러나 그가 자금을 대 출항한 배는 돌아오지 않았고, 안토니오는 보증 선 빚을 갚을 길이 없어 결국 법정에 서게 된다.      


베니스의 법정은 당시 자본에 대한 베니스의 시민들의 인식과 신용의 질서를 잘 알고 있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차용증서의 조항을 관철하려는 샤일록의 요구에 따라 열린 재판은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판결을 남기고 마무리된다. 샤일록의 요구를 들어주되 1파운드의 살 외에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샤일록에게 파멸을 안긴다.     

마우리치 고트리브, 샤일록과 제시카

이 이야기는 오늘날 빚과 신용의 문제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이야기에서 왜 샤일록은 나쁜 인간의 전형으로 비쳐지게 된 것일까? 지불에 대한 약속을 받는 것, 신용의 문제에서 왜 선과 악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의 모든 질서의 중심에 있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생활 습관을 고집했다. 그들과 섞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유대인 거주지역이 제한된 상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은 제한적이었다.

오늘날 은행을 뜻하는 bank는 이탈리아어로 banco, 즉 의자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는 당시 유대인 대부업자들이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돈을 빌려주던 의자를 뜻한다. 

이들은 이곳에서 고리의 돈을 빌려주며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샤일록도 이들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영화 '베니스의상인'의 포스터

그런데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기엔 뭔가 허술하다. 

잠시 르네상스 3대 화가 중 한명인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자. 

이 작품은 성서에 기록된 예수 재림의 날 이루어질 심판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 지옥이 묘사되어 있는데 대부업자의 방이 따로 있다. 이자를 받는 것은 기독교 사회에서 죄악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부분

단테의 <신곡>에서도 고리대금업자가 목에 지갑을 걸고 영원한 고통 속에 빠져 있다. 이러한 죄의 근거는 성서의 구약에 나와 있다. 신명기 편을 보면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이자를 받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경제활동이 대부업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업이 르네상스 이후 상업의 발달과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호황을 누리게 된다. 일확천금의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유대인들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자금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넘쳐났다. 


그리고 돈이 회수되지 못할 때를 대비한 이자도 이때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 사용하는 피보나치 식의 이자계산법이다. 

쿠엔틴, 메치스, '대부업자와 그의 아내'

자연스럽게 수요 공급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회수 가능성이 높은 배를 가진 사람이나 담보가 확실한 사람이 우선적으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급전이 필요한 서민에게는 그나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설령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어마어마한 이자가 뒤따랐다.      


이들은 그 사업을 불려 점차 은행으로 성장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고리대금업을 은행이란 새로운 얼굴로 바꾸었다. 이들에게 돈은 엄청난 권력이었고, 훗날 부르주아의 출현을 이끌기도 한다.      


예수 경배의 자리에 메디치가의 인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이때부터 대출은 조직화되고 교묘해진다. 그들에게 돈은 영광을 가져다주고 권력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가문의 딸들은 왕실로 시집을 갔고 아들들은 교황이 되었다. 


돈의 힘이었다. 


그러면서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예술가들을 키우기도 했다.     

메디치가는 고리대금 방지법이 등장하자 그것마저 교묘히 피했다. 

바로 무역 거래시 환전서비스를 한 것이다. 여기서 수수료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이자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승승장구하며 은행가로 확고한 입지를 굳힌 후 메디치 가는 교황 3명, 프랑스 왕비 2명, 공작 3명을 배출했다. 이 같은 메디치가의 성장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코시모 데 메디치다. 

보티첼리의 그림 <메달을 든 사람>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보티첼리, '메달을 든 사람'

메디치가 이후 돈의 유통이 전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면서 유럽 각지에 은행이 생기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말까지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고, 세계 최대의 무역국이었으며, 세계 최고의 금융 선진국이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에서 독립을 쟁취할 무렵, 서유럽의 상선 가운데 반 이상은 네덜란드 배였다. 네덜란드의 번영에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자본과 노하우가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메디치가가 확립한 은행 모델과 이윤추구라는 태생적 한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행은 메디치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담보 심사를 강화하고 확실한 신뢰가 주어지지 않을 경우 대출을 거부한다. 


이러한 안정 중심의 대출에 의해 오늘날 모든 산업이 불황일 때도 은행업은 매년 최고 실적을 거둔다. 

그들이 거둬들인 수익 가운데 이자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80%가 넘는다.      


더 큰 문제는 대출의 집중이다. 예전에는 전체 대출 가운데 3분의 2가 기업 대출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체 대출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기업대출은 부도율이 높고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부도율은 낮고 수익률이 높은 주택담보대출로 채웠다. 이들에겐 황금알을 낳아주는 닭인 셈이다.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높다는 이유로 기업이나 신용도가 낮은 개인은 대출의 벽을 지나치게 높여 ‘전당포 영업’이란 조롱 섞인 말을 듣는다.     

그러한 영업 덕분에 한국의 4대 은행은 당기 순이익 ‘1조원 클럽’에 진입했다. 

서민 경제나 국가경제의 어려움은 이익에만 매몰된 은행들에겐 남의 이야기이다. 


메디치가 이후로 내려온 그들의 전통적인 영업방식은 사회 요구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메디치가에서 선주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에게만 자신의 주머니를 열었던 것처럼 지금도 산업의 활력이 되기보다 손쉬운 이자 장사에 매달리고 있다. 눈물 흘리는 청년들의 고통분담이나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사업에 대한 지원 대신 당기순이익이 얼마인가만 계산하고 있다. 


스스로를 고리대금업자 정도로 격하시키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자를 통한 돈벌이에 매달려온 그들을 향해 우리 사회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기업에 그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 이 사회에 책임을 다해달라고 주문하듯이 돈의 신성한 가치를 왜곡하고 있는 은행들에게도 요구하고 있다. 은행들이 눈을 좀 더 아래로 향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들이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금융 문제를 시장 논리로 풀릴 수 있다. 문제는 금융의 접근이 어려운 빈민계층과 기술력을 확보한 기업, 미래를 안정되게 할 농업이나 기초분야이다. 금융이 외면하는 동안 정부는 금융이 아닌 다른 형태의 지원에 의존해 왔다.     

 

물론 일반 서민은 재산과 소득에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금융 입장에서 보면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은행은 수익과 회수 가능성을 전제로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더 많은 이자를 지불하며 철저히 을의 입장에 서야만 했다. 은행 문턱에도 부익부빈익빈이 고착되어있다. 게다가 잘못될 경우 신용에 문제가 생겨 빈민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정부는 예산을 통해 이들을 구해야 한다. 결국 은행의 소외가 사회의 부담으로 넘어온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모습보다 미래의 모습을 봐야한다. 


그동안 을의 입장에 서 있던 서민들은 두 갈래 길 앞에 서있다. 중산층으로 편입될 수도 있고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들이 중산층으로 편입하기 위해서는 안정정인 생활기반이 우선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현재 금융이 가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지역재투자법’을 통해 금융기관들이 낙후된 지역이나 계층을 위한 금융을 제공하는 의무를 부과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우리 시대의 은행을 포함한 모든 금융에 필요한 것은 장기적인 투자다. 

이는 사회나 경제, 문화 전반의 안정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대출은 장기적인 비전으로 봐야한다. 

만약 은행들이 핵심 기술과 인프라 개발을 위해 30~50년 대출을 제공할 수 있다면 어떨까? 지금까지는 이러한 투자에 대해 고려되지 않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은 미래 경제에 새로운 안정성을 부여할 것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장기 대출은 여러 면에서 효과가 확실한 프로젝트에 국한돼야 할 것이다. 


기존에 정치권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영향을 미쳤다면 이제는 그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대출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분야로 옮아가야 한다.     


이러한 장기대책의 한 예로 그러한 정책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농업에 대한 장기 투자 정책일 것이다. 농업은 유교 경제 체제의 핵심이었지만 우리는 최근 금속한 산업화와 함께 농업에 대한 가치를 상실해 왔다. 언제부턴가 땅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주택, 공장, 고속도로, 심지어는 각종 폐기장 같은 것들에 잠식당할 때까지 외면하고 방치했다.     

하지만 기후변화라는 변수가 상수로 자리잡은 지금 모든 것이 바꾸었다. 앞으로 한국은 수입 식품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보다 따뜻해진 기후에 적응하려면 은행은 고도로 효율적인 농업 체제의 발전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기본적인 것에 대한 충족은 안보로까지 연결된다. 또한 농촌 경제가 역동성을 회복하고 청년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성장자본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규제가 고도로 완화된 경제에서는 돈의 출처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생각은 경제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성장의 왜곡을 초래하는 정책을 낳는다. 정부가 보장하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저축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에서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은행은 서민들을 고객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공유가치창출(CSV:Creating Shared Values)의 관점에서 금융기관의 수익구조 재편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서민을 위한 상품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 동시에 사회가치를 실현시키는 노력 또한 기울여야 한다.      


정부 역시 나라의 기초를 이루는 서민들의 금융정책에서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수익성과 안정성을 추구하는 은행에만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은행이 될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확장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만들어진 낮은 금리의 대출은 사회를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고 국가의 부(富)가 평등하게 분배되게 만들 수 있다. 


지금은 은행이 오늘의 사회에서 복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이며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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