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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24. 2019

쉬었다 가세요

쉬었다 가세요          


터키 에페소스 고대 유적의 도로에 깔아놓은 대리석에는 기원전 1000년경에 새겨진 발 모양의 그림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결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매매 광고판이라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저와 사랑을 나누시려거든 발 그림을 따라오세요.” 

그림을 보고 발마사지로 오해할까봐 그랬는지 그 옆엔 친절하게 벗은 상반신의 여성과 하트 모양의 주머니에 동전까지 새겨 놓았다. 아마도 이 길을 따라오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발의 크기를 보고 미성년자를 구분하는 데 쓰였을 수도 있다.      

에페소스의 유적

고대 로마의 에페소스 유적 말고도 매음지대에서 실재 유통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전도 있다. 지금 시대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매춘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동전에는 매춘부들에게 주어지는 모양과 숫자에 따라 매춘의 종류가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그들만의 성문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매매춘이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성매매 여성을 뜻하는 단어 ‘헤타이라이(hetaerae)’는 오늘날의 의미로 해석하면 '인생의 파트너' 혹은 '친구'라는 의미정도로 풀이된다. 


성매매는 이처럼 오래된 테마다.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지나며 중세 이후 오늘날까지 성에 대한 문제는 오랜 세월 음지에서 금기시 되어왔다. 중세시대엔 강력한 족쇄가 있어 다소 수그러들었지만 무역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태동하면서 다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러한 세태를 화가들은 그림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티치아노의 경우 제우스와 다나에의 사랑을 그린 동일한 주제의 두 그림이 있다.

그린 시기가 1545년과 1554년으로 대략 9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나는 나폴리에서, 나머지 하나는 프라도에서 그린 것이니 지역적으로도 겹치는 것은 없다. 언뜻 보기에 다나에의 침대에 누워있는 포즈나 제우스를 향한 시선에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래 그림은 왠지 낯이 익다. 바로 후기인상파로 알려진 마네의 <올랭피아>를 연상케한다. 반면 나폴리에서 그린 그림은 이전의 신화작가들이 그리는 스타일에 충실해 보인다.     

나폴리 그림을 보다보면 파스칼의 말이 떠오른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해서, 또는 이익이 있으므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 행복을 느낌으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티치아노, '제우스와 다나에' 나폴리 버전

그림 속 제우스와 다나에의 사랑 또한 이처럼 아름답다. 빠져나갈 틈 하나 없이 꽉 막힌 벽 속에 갇혀 있는 다나에, 그러한 그녀를 찾아 황금 빗물이 되어 그녀에게 찾아온 제우스의 사랑은 그 자체로 달콤하다. 황금빛의 환상적 사랑은 다나에를 포근하게 감싼다. 


그녀의 표정에서 무한한 사랑이 보인다. 제우스의 존재가 답답하던 방을 사랑으로 가득한 방으로 바꿔 놓는다. 그 사랑이 그녀를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품는 그녀의 사랑은 이제 혁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프라도에서 그린 그림을 보면 다나에의 허벅지에 걸치고 있던 천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보다 적극적인 유혹의 자세로 침대에 기대 있다. 

나폴리 그림에서 보여줬던 제우스의 고귀함과 권위는 사라지고 물욕만이 가득하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사라지고 황금을 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노파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티치아노, '제우스와 다나에' 프라도 버전

더 이상 고귀한 왕가의 여인이 아니다.

화가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다나에를 고급 창부쯤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티치아노는 당시 베네치아의 정신적 타락을 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 말 베네치아는 유럽 제일의 무역 중심지였다. 경제활동의 중심지답게 많은 외국 상인들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그러다보니 덩달아 성장한 사업이 매춘이었다.   

  

16세기 그리스도교의 전설상의 성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매춘부 베로니카는 프랑스 왕 앙리 3세를 고객으로 둘 정도였다. 

문제는 베네치아의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에서 밀려난 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반대로 매춘 사업은 점점 확장되어 17세기로 넘어오면서 만 명이 넘는 매춘부들이 활동했다. 베네치아 전체 인구가 10만을 넘은 적이 없었으므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풍조는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세계적 빛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에서도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우유를 따르는 여인'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에 '뚜쟁이'라는 아주 특이한 작품이 하나 있다. 2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린 그림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림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뚜쟁이'

노란색 옷의 젊은 여인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다. 그녀의 뒤로 붉은 옷의 남성은 한 속으로 돈을 건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인의 가슴을 만지고 있다. 남자의 옆에서 나이든 여인이 뭔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왼쪽의 남자는 웃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이 그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한창 흥정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의 그림에서 시대를 비판하고자 했다는 얘기도 있고, 성서의 돌아온 탕자를 빗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리고 모델이 베르메르 자신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구도와 소재에서 유사한 조선시대 풍속화를 찾을 수 있다.     

 

삼추가연(三秋佳緣)이란 제목의 혜원 신윤복이 그린 그림이다. ‘가을 세 명의 아름다운 인연’이란 제목에서 보면 뭔가 아름다운 스토리가 있을 법한 그림이다. 


제목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은 그림을 보는 순간 여지없이 깨진다. 그림 속 노파는 베르메르 그림에서처럼 뭔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남성에게 술을 따른다. 젊은 여인은 뒤돌아 있어 얼굴을 알 수 없지만 상황을 얼추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힘은 뺀 채 다리를 벌린 그녀의 모습에서 은근한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아마 젊은 여인이 기녀이고 남성이 돈으로 초야권을 사는 장면으로 노파는 두 사람을 중재했을 것이다.      

혜원 신윤복의 삼추가연(三秋佳緣)

신윤복은 이들의 모습에서 당시 사대부들의 타락과 이를 외면하는 양반사회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에서 오늘의 한국사회로 이어지는 유교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그중 성에 대한 부분에서 특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구별이 엄격했던 유교사회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가부장제는 여성의 지위뿐 아니라 여성을 성적 학대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오늘날 근대화를 거치면서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사람들의 기대는 여전히 기대로만 남아 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도 축첩제도와 같은 악습이 허용되고 있었다. 또한 계급적 장벽이 높아 여성은 성적 자기결정권마저 박탈당해왔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자제를 요구하고 남녀 간의 예의를 강조하고 있음에도 이들 대부분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교사회에서 여성이 지켜야할 정조에 대한 관념을 먼저 허물어 버린 것도 사대부들이었고, 여성을 성적 소비 대상으로 상품화한 것도 그들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피해자는 여성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성매매는 자발성과 관계없이 여성의 낮은 사회적·경제적 지위 등을 이용한 성 착취 산업이다.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가 죄악이 될 수 없다고 얘기한다. 혹자들은 성매매 여성들의 정조 관념을 얘기한다. 사회는 무엇이 그들을 어두운 골방으로 몰았는지는 보지 않고 단속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오라고 말한다. 

빠져 나와도 사회는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가끔은 필요에 의해 미화시키기도 한다.     

우리 시대에 줄리아 로버츠와 리처드 기어가 주연한 ‘귀여운 여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여운 여인은 인생을 망치는 성매매에 대한 터무니없는 미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신데렐라가 아닌 성매매 여성에 대한 폭력이고 모욕이다. 모두를 속이는 일이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포스터

이들의 성매매가 그렇게 쉽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나 표시나지 않는 일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돈을 받고 그 모욕적인 보상을 몸과 마음, 정서까지 해쳐가며 치러내고 있다. 그들은 피해자임에도 사회에서 격리당한다. 

그들은 성을 착취당하고 몸과 정신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것을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혹여 자발적으로 그 일을 했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큰 상처로만 남는다.      


21세기 한국은 여전히 유교적 가치가 지배적이다. OECD 34개국 가운데 낙태, 매춘, 사촌간 결혼, 동성간 결혼, 포르노 등을 금지하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성에 대해 한국 사회처럼 보수적인 나라도 드물다. 유교 사회에서 욕망에 대한 절제가 미덕이라는 가르침이 겉으로나마 유효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바로잡을 최소한의 근거는 남아 있다. 이제 내면에서부터 이 가르침을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고산_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 건축공학(학사), 환경대학원(석사), 공과대학 건축대학원(박사),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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