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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29. 2019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로도 나온 소설 ‘은교’. 70대 노인과 17세 소녀의 파격적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소설 속 노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의 포스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늙음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간다. 그냥 가는 게 아니다. 늙는다는 건 상실을 의미한다. 육체적으로 상실하는 것 외에도 사회적으로도 모든 것을 빼앗기며 나아간다. 직장을 잃고 권위를 잃고, 자식은 품에서 떠나보내고, 배우자는 하늘로 떠나보낸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상실의 벌을 받는다.


그 상실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기억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그의 작품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나이 든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살인자의 기억법’은 우리의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쇄살인범이자 주인공은 악보다 무서운 존재는 우리의 기억이 담고 있던 시간임을 깨닫게 한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주인공이 시간 앞에 무릎 꿇는 모습에서 지금의 나의 정체성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 기억이 사라질 때 ‘나’라는 존재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포스터

사람은 나이 드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벤자민이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도리언처럼 우리의 늙음의 과정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회당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줄기세포 주사로 노화를 방지해준다는 그러나 아직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일들까지 하며 버티지만 막을 수 없다.     


네델란드 화가 램브란트는 젊어서부터 자신이 나이 들어가는 과정, 엄밀히 말해 늙어가는 과정을 초상화 70여 점으로 남겼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다양한 감정, 삶의 기복을 담고 있다. 인생의 황금기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쓸쓸히 말년을 보내는 모습까지 그의 삶의 궤적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램브란트, '자화상'

특히 나이 들어 황혼기에 접어든 그의 모습에서는 미화하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고단하고 초라한 노인이다. 깊게 패인 피부와 주름, 힘없는 눈에서 나이뿐 아니라 인생에서의 후회와 슬픔, 지친 심신까지 잘 드러나 있다. 애써 울음을 참으려는 굳게 다문 입에서는 그래도 아직 살아있다는 자존심마저 느껴진다.     

인생 최고의 순간을 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그저 살아온 날을 일기 쓰듯 그려내고 있다. 

나이 드는 모습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나이와 함께 잃어가는 것들까지 담담하게.      


그의 마지막 자화상에는 웃는 모습이다. 

그는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본래의 피부색을 모두 잃은 하얀 얼굴에 입을 살짝 열고 웃고 있다. 덩어리째 흘러내릴 것 같은 거칠게 덧입혀진 물감, 단조로운 황토색과 먹만으로 빚은 얼굴이다. 


그의 표정과 거친 주름 사이로 보이는 살아온 인생의 흔적은 왠지 슬프고 섬칫한 느낌마저 준다.     

램브란트, '자화상'

램브란트는 노년의 역설을 이야기하며 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술사가 이연식의 말처럼 ‘빛나는 역량도 탁월한 성취도 안락을 주지 않으며, 분투할수록 수렁에 빠진다는 역설’. 그래서 ‘역설을 깨닫게 한 고통과 허무 속으로’ 물러서고 있다.  

얼굴과 몸에 주름 가득한 노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신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하자 미친 듯 웃음을 터뜨리다 숨이 넘어가버린 전설의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처럼.     


나이 들어 무언가를 한다는 것, 인정받지 못하는 그 무엇, 심지어 조롱이 되는 그 무엇 앞에 놓이게 되는 고통과 허무. 심지어 그 고통마저 사라지게 하는 기억의 상실은 또 다른 역설을 부른다. 고통과 허무의 기억을 잃음으로 행복해지는 역설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성형외과에 나타난 나이든 주인공에게 낯선 시선을 보내는 젊은이를 향해 던진 말


“누구 보라고 하는 거 아니야, 나 보려고 하는 거야. 우리도 아침에 세수하고 이 닦을 때 거울 보잖아. 그때마다 내가 흡족했으면 해서 하는 거야. 예뻐지고 싶은 맘 그대로 몸만 늙는 거야 이것들아”라고 말한다.


조롱이 되는 나이듦이 ‘은교’의 소설 속 말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을 다시 소환하게 한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쓴 <우신예찬>에 등장하는 조롱과 혐오는 시대를 넘어 지속되고 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마치 저승에서 막 돌아온 듯한 송장 같은 할머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를 끊임없이 연발하고 다니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런 할머니들은 암캐처럼 뜨끈뜨끈하고, 그리스인들이 흔히 하는 말로 염소 냄새가 난다. (중략) 또 처녀들 틈에 끼어 술을 마시며 춤을 추려 하고 연애편지를 쓰기도 한다. 모두가 비웃으며 그런 할머니들을 두고 다시 없는 미친년들이라고 말한다.”     


1500년대의 사회분위기와 풍자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여성혐오’와 ‘노인폄훼’로 가득한 글을 보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다. 심지어 이 글을 토대로 화가 퀸텐 마세이스는 그림 하나를 내놓았다.  

   

퀸텐 마세이스, '늙은 여인'

병으로 얼굴이 기형이 된 노인, 그녀는 애써 아름답게 꾸미거나 젊어지려 애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가슴골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캔버스 앞에 섰다. 옷으로 인해 쭈글쭈글한 피부가 더 드러나는 상황에서도 약혼을 의미하는 빨간 색의 꽃을 들고 있다. 그녀는 지금 누군가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세스의 <늙은 여인>이란 이 그림은 우신예찬을 참고해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은이 흉내를 내는 상황을 풍자한 그림이다. 


화가가 이렇게 노골적이면서도 조롱하듯이 나이든 여인을 그린 것은 당시 분위기가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혐오와 조롱은 50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늙음’은 ‘지혜’와 동의어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 나이든다는 것에 대해 온통 조롱, 혐오, 빈곤에 대한 걱정뿐이다. 경로(敬老)를 비꼰 단어 ‘혐로(嫌老)’가 등장하고 노인들을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리는 벌레), ‘할매미’(매미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할머니), ‘연금충’(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는 벌레) 등으로 비하하기까지 한다. 


나이가 드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런 조롱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눈이 부시게> 드라마의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은 작은 위로가 된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우리에게 말하는 가장 소중한 것들. 


시간은 서서히 흘러가고 거기에 서서히 채워져야 할 기억들. 거기서 피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을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소중한 자신의 드라마다.     


윌리엄 새들러. 「서든 에이지, 마흔 이후의 30년」에서 말한 것처럼.     


“생명을 얻고 싶다면 먼저 그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첫 번째가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처음이 될 것이며, 마음이 온유한 자가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사랑을 주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신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지상의 이웃에게 정성을 쏟아야 한다. 철학에서도 역설을 옹호한다. 지혜는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위대함은 우리의 한계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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