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산 Mar 29. 2019

천국의 눈물 (Tears In Heaven)

천국의 눈물 (Tears In Heaven)   

   

죽음과 이별 앞에 흘리는 눈물은 떠난 이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손길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에 우리는 더 큰 슬픔을 느낀다.     


영국의 대표적인 기타리스트 에릭 크랩톤은 블루스 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음반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레미상을 8회나 수상할 정도로 수많은 히트곡을 가진 그이지만 인생의 행복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엄마와 헤어져 지내고, 친구를 시기해 그의 부인을 빼앗아 결혼까지 했다. 한 순간 찾아온 그의 침체기는 알코올과 마약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그의 침체기는 너무 길었고 이를 견디지 못한 아내와 헤어질 위기까지 다다랐을 때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녀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하고 음악 인생의 2부를 준비했다. 

그 사이 아들 코너도 태어났다. 늦은 나이에 태어난 아들은 그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으로의 재기는 쉽지 않았고 다시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그의 아내는 아들 코너와 함께 친정으로 떠나버린다.      

사랑하는 아들마저 볼 수 없게 되자 낙담한 그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작곡과 음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들이 네 살이 되던 날 아내와 헤어진 후 처음으로 아들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된다. 이제 아버지가 되어 평탄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을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받아든다. 네 살 된 아들 코너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해 사망했다는 것이다.  


아들은 아빠와 만날 기대감에 베란다에 나가 자신을 만나러오는 아버지를 보기위해 난간에 기대 있다 추락사한 것이다.

추락한 아들의 손에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가 들려 있었다.


‘I love you!'     


에릭의 충격과 슬픔은 너무도 컸고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아들에게 답장을 쓴다.     


내가 널 천국에서 만난다면 네가 아빠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널 천국에서 만난다면 넌 예전 모습을 하고 있을까?

...

내가 천국에서 널 만나면 내 손을 잡아주겠니?

내가 천국에서 널 만나면 내가 굳건히 설 수 있게 도와주겠니?

...

저 문 너머 천국에는 분명히 평화가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더 이상 눈물 흘릴 일도 없을 거라고 믿는다.     



슬픔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 그리고 부침 많았던 자신의 사생활과 아들의 죽음 앞에 오열하던 그는 코너에 대한 답장에 담담히 멜로디에 담아 92년, <Tears In Heaven>으로 발표했다. 기타 연주와 함께 공허하게 들리는 그의 억제된 보컬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에릭은 천국 어딘가에 있을 아들에게 조용한 답장을 보냈다.

자식을 잃고 그 슬픔을 음악으로 풀어내면서 느꼈을 감정은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는 말이 있다. 

눈이 멀 정도로 슬프다는 의미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의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자하가 그의 아들의 죽음 앞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그만 눈이 멀어버린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표현으로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을 가리켜 ‘참척의 변(慘慽之變)’이라도 한다. 참혹하게 서러운 일이란 뜻이다.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중국 진(晋)나라 제후인 환공이 삼협(三峽)의 강가 길을 따라 유람에 나섰는데 하인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러자 어미가 구슬피 울어대며 무려 100여 리를 함께 따라오다 자식을 구할 길이 없자 뱃전에 머리를 들이받아 죽고 말았다. 어미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비통의 극치를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즉 단장지애는 이처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참담한 심정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시인 난설헌(雪軒) 허초희 역시 자식을 먼저 떠나보냈다. 그녀는 <곡자>란 시에서 자식 잃은 비통한 울음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해 귀여운 딸아이 여의고

올해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사시나무엔 쓸쓸한 바람 불고

숲속 도깨비불 희미하게 빛나네

지전 살라 저희 넋을 부르며

무덤에 술잔 따라 제를 올리네

너희 넋이야 오누이인줄 알고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겠지   

  

허난설헌은 어린 남매를 잃고 임신한 아이가 유산되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의 친정마저 몰락한다. 그녀를 괴롭힌 이 비탄과 절망은 그녀마저 2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다.

사실 그녀의 시와 일화들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적어도 봉건적 조선시대와 군사독재 시절엔 신사임당 같은 포장하기 좋은 캐릭터가 필요했으리라. 

허난설헌 기념관의 난설헌집

그런 면에서 난설헌 허초희는 감춰질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것에 반기를 든 그녀가 달가웠을 리가 없다. 게다가 봉건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회참여적 작품들은 더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회에 저항하며 강인한 여전사 같던 그녀도 자식을 잃은 슬픔 앞에서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음악이나 문학이 아닌 그림으로 표현될 경우 시각적인 공감이 더 강해진다. 자식 잃은 이의 마음의 소리까지 그림 속에 담겨지기 때문이 아닐까?


19세기 화가 윌리엄 부게로는 다섯의 자식 중 넷과 아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첫 애도(아벨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그의 그림은 자식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아담과 하와가 자식 아벨을 떠나보내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윌리엄 부게로, '아벨의 죽음'

이 순간을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세기 4장 8~10절)      


화가는 이것을 아벨의 죽음보다는 남은 가족의 아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림에는 강렬한 색은 모두 배제되었다. 

배경으로 아벨의 제단이 보이고 그 연기는 하늘의 폭풍 구름과 어우러져 비극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산자 가인보다 죽은 자 아벨이 부각되고 가슴 속에 기억될 존재로 부각시킨다.     


독일의 천재 여류 판화가 케테 콜비츠는 그 슬픔을 판화작품으로 표현했다. 그녀의 두 팔에는 죽은 자식의 관이 들려 있다. 

어머니의 얼굴과 관, 관을 든 두 손은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듯 거칠게 나타나 있다. 그녀는 지독한 어둠 속에 갇혀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관은 다 자라지 못한 자식을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콜비츠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18살 난 아들을 잃고, 손자마저 잃었다.

케테 콜비츠, '아벨의 죽음'

조용히 감은 눈과 무표정한 얼굴은 너무나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녀의 무표정은 그 무엇으로도 그 감정을 담아낼 수 없어 비워 놓은 표정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無’가 아닌 ‘공空’인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얼굴이다. 슬픔과 그리움, 애틋한 마음까지.     


신화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길 때는 스토리텔링이 함께하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극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대표되는 이는 니오베다. 


니오베는 남편이 테베의 왕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왕비였다. 자식 복도 많아 일곱 아들에 일곱 딸을 뒀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오만은 경계를 넘기 일쑤였다. 심지어 자식이 둘밖에 없는 헤라 여신마저 공개적인 자리에서 놀리곤 했다. 

콘라드 마틴 메츠, '니오베와 죽어가는 자식들'

분노한 여신은 쌍둥이 남매인 아폴로 신과 아르테미스 여신을 불러 복수를 부추겼다. 어머니가 능욕당했음을 알게 된 아폴로와 아르테미스는 그 길로 인간 세상에 내려가 니오베의 아들들부터 차례로 죽였다. 니오베의 남편은 절망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침내 모든 자녀와 남편마저 잃고 막내딸 하나만 남게 되었다. 막내딸은 공포에 질린 채 달려와 어머니 니오베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니오베가 막내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두 신은 애초부터 자비를 베풀 마음이 없었다. 막내마저 죽자 그녀는 넋이 나가고 감각을 잃었다. 

피에르 찰스 좀버트, 니오베와 죽어가는 자식들'

오비디우스는 이 장면을 이렇게 시로 전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며/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핼쑥해졌다./머리도/끌로 판 것처럼 굳었다./뜬 눈도 돌이 되었다./몸 전체가 하나의 돌이 되었다.”     


그것은 사람을 돌로 만들 정도로 엄청난 상처였다. 돌이 되어서도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무시되어서도 안된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세월호가 춥고 어두운 바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려지던 날도 부모들의 가슴 속에 잠든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산업현장에서 자식들이 사발면 하나 가방에 넣고 일하다 쓰러져갈 때 부모들은 자기 자신부터 탓했다. 그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무지와 가난을 탓했다. 

그런 아픈 부모의 마음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주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형 사건들 앞에서 충격적인 모습들을 목도했다. 세월호 당시 이른바 '피자 폭식 투쟁'이다. 최근 일어나는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조롱 역시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심지어 반도체 공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에게까지 입에 올리기 힘든 표현이 난무한다.     

그들에게 먹는 행위나 욕하고 조롱하는 것은 단지 미개와 야만일 뿐이다. 그들의 구호나 퍼포먼스들에서 육체적 정신적 허기를 채우는 행위는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가 물위로 오르던 날 하늘의 세월호 리본 구름


이들에게는 장난처럼, 혹은 영웅심에 그랬을 거라고 애써 무시하더라도, 그래도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폭풍 같은 소나기는 아닐지라도 한 방울의 물이 그립도록 갈증에 시달리는 이들이다. 조금만 다가가 손잡아주고 조금만 다가가 귀를 기울여주고, 그리고 고개라도 몇 번 끄덕여주는 것만으로도 감동의 눈물을 흘릴 이들 앞에 야만의 폭력성을 드러낸 것이다.     

세월호의 한 아버지는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아빠를 비난하고 조롱하며 죽은 아이들을 오뎅이라 부르던 모욕을 참아냈으며, 폭식 투쟁하는 일베들이 편히 먹을 수 있게 배려하여 자리도 깔아주었던 기억을 하나하나 짚어내며…"     

그 아버지는 누군가 잊으라 해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자신이 되어버린 아들을 기억하는 어느 시인이 기억하는 아버지처럼.   

  

비문 

                           손세실리아     


광화문 광장 유족 막사에

허깨비처럼 서 있던 남성의 종아리를

힐끗 본 이후 선입견을 접고 말았다

화보도 기사도 이슈도 되지 않지만

오직 한 존재를 기려 남긴

1997. 4. 20.

아들아 보고 싶구나     

작가의 이전글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