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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29. 2019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라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라     

 

‘계영배(戒盈杯)’라는 잔이 있다. 

어찌 보면 장난감 같은 이 잔은 이름 그대로 ‘가득참을 경계하는 잔’이다. 일정한 높이 이상의 물이나 술을 채우게 되면 사이펀 효과에 의해 내용물을 비워버리는 잔이다.     

계영배, 명장 김갑용 작

이 잔은 여느 잔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중심에 기둥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 기둥은 꼭대기 내부가 빈 채 아래쪽 구멍과 연결되어 있다. 빈 공간은 잔의 다리에 난 구멍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다. 

잔을 채우면 채워진 물과 술은 파스칼 원리에 의해 기둥 속으로 들어가 위쪽 공간을 채우게 된다. 그런데 그 공간 이상으로 물과 술이 채워지면 모든 액체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흘러나오게 된다.     

   

이러한 잔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제나라 환공은 이 계영배를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며 마음을 가지런히 했던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불렀다. 제자들 앞에 이 잔을 놓고 총명함을 뽐내지 말고 공을 치켜세우지 말 것, 그리고 겸손할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공자 역시 ‘계영배’를 항상 곁에 두고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도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지나친 욕심을 경계한 덕에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홍천 지방 전설에는 도공 ‘우명옥’이 자신의 스승을 뛰어넘어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는데 그만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방탕한 삶을 뉘우치면서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계영배는 지나친 욕심으로 넘쳐나는 것보다 오히려 부족함이 현명하다는 가르침을 줄 때 인용된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이러한 과욕이 화를 부를 수 있음을 경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카루스는 태양을 향해 높이 솟아올랐다가 너무 높이 날아올라 날개에 쓰인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한 인물이다.

드레퍼 허버트 제임스, '이카루스에 대한 애도'

그는 미노스 왕의 신하이자 장인(匠人)이었던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그들은 크레타 왕비 파시파이의 부정을 도왔다는 이유로 미로에 갇히게 된다. 그러자 다이달로스는 새들의 깃털을 모아 하늘을 날 수 있을 정도의 날개를 만들었다.

날개가 완성되고 탈출하기 전에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에게 당부한다.     


"너무 높이 날아 태양 가까이 가면 그 열에 밀랍이 녹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물기가 날개에 스며들어 무거워지니 하늘과 바다의 중간으로만 날아라."   

  

하지만 이카루스는 이를 어기고 하늘 높이 올라갔고, 결국 날개를 연결하는 밀랍이 녹아서 추락하고 만다.      

<변신 이야기>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마도 떨리는 낚싯대를 붙잡고 고기잡이에 열중했던 어부, 장대에 기대고 있던 양치기, 또는 쟁기에 몸을 구부린 농부는 자신을 지나쳐 날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 멈춰 서서 공기를 가르고 나는 이들이 분명 신이라고 믿었다.”           

브뤼겔, <추락하는 이카루스>

   

이러한 <변신이야기>의 장면 묘사는 브뤼겔의 그림으로도 잘 나타나있다.

바다에 추락해 다리만 겨우 보이는 이카루스는 그림의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주인은 하얀 옷을 입은 낚시꾼, 장대에 기대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양치기, 밭을 갈고 있는 목동이 주인공이다. 

다만 이들은 변신이야기에서 얘기하는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이카루스의 추락은 큰 사건이 아니다. 낚시하고, 양을 치고, 밭을 가는 일상 생활의 흐름 속에 있을 뿐 일상에서 벗어난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욕망을 상징하는 이카루스를 거부한다기보다는 신이 정한 일상을 따른다고 보는 것이 맞다.     


브뤼겔은 왜 이런 해석을 했을까? 엄밀히 말해 <변신 이야기>에서 이 신화가 의미하는 것은 일종의 경계로 보기 때문이다. 신분 상승에 대한 어리석은 욕망, 타인의 불행에 대한 냉담함에 대한 우화인 것이다. 금욕주의로 알려진 스토아철학의 생각을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삶의 행복은 마음의 평정에서 온다. 그 평온함은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이미 얻은 것을 원하라."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다.     


결국 브뤼겔 그림 속 농부와 양치기, 낚시꾼이 이카루스를 외면하는 모습에서 스토아철학의 사상이 녹아있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가 권위와 지위에 대한 우화라면 미다스 왕은 인간의 물욕을 경계하는 우화라 할 수 있다.      

기원전 8세기 경 프리기아의 왕 미다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을 황금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디오니소스가 그 간청을 마지못해 들어주자 미다스왕의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이 황금으로 변했다.

디오니소스와 미다스왕

나무를 만지면 황금나무가 되고, 사과를 만지면 황금사과가 되는 것을 본 미다스왕은 자신의 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손으로 만져 황금으로 바꿨다.


그런데 그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의 손에 닿는 모든 음식까지도 황금으로 변하는 바람에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딸마저 황금으로 변하고 만다. 주변 사람들은 혹시라도 황금으로 변할까 무서워 미다스 왕의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후회하고 디오니소스에게 능력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다. 디오니소스는 파크톨로스 강에서 씻으면 그 능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 길로 강으로 달려가 몸을 씻자 그의 능력이 사라지고 대신 강물은 황금빛으로 변해 강바닥에 쌓였다.     


이 신화에서 '미다스의 손'은 저주를 의미한다. 탐욕과 과욕은 결국 화를 부른다는 교훈이 그리스 신화에 숨어 있는 것이다.      


사실 미다스 왕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졌음에도 더 많은 부를 원했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 것은 자신 스스로를 부에 종속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얻게 된 행운의 이면에 도사리는 것들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던 것이다.    

 

안드레아 바카로, 미다스왕

탐욕은 국가와 사회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는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엘도라도의 전설을 쫓아 그곳까지 온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스페인 정복자들의 탐욕도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무기를 앞세워 잉카군을 상대로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승리한 스페인은 지금은 볼리비아에 속하는 안데스 고원의 광산을 찾아낸다. 당시 그곳 광산은 스페인에서 통화로 사용하는 은을 엄청나게 품고 있었다. 

카하마르카 전투에서의 피란시스코 피사로

스페인은 그 은을 채굴해 본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 채굴에 동원된 사람들은 모두 잉카인들이었다. 사실 잉카인들에게 금과 은은 금속 이상의 어떤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광산에 끌려가 고된 노역을 해야 했다. 기록에는 그곳에 끌려간 잉카인 여덟 명 중 한 명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문제는 본국 스페인에서 터졌다. 


지나치게 많은 양의 은이 신대륙에서 유입됨으로 인해 화폐의 가치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고, 다시 이 물가에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양의 은이 필요해지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스페인의 경제는 파탄에 이르고 해상 패권마저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페인 무적함대

개인의 탐욕은 자신만을 망치지만 국가적인 탐욕은 그 국가와 국민의 미래까지 나락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국가의 거의 모든 산업이 재벌이란 일부 특정 집단들에 편중되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이 '재벌'이 탐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기에 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벌은 재계에서 큰 세력을 가진 독점적 자본가나 기업가의 무리, 또는 일가나 친척으로 구성된 대자본가의 집단을 뜻한다. 이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현상으로 떠올라, 영어사전에 ‘chaebol’이란 단어로 등재돼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오늘날 수입 명품에 삼각김밥까지 문어발 뻗치는 재벌의 탐욕을 보고 있다.

이제는 지도에도 잘 표시되지 않는 시골을 가도 골목마다 있던 동네 ‘슈퍼’는 사라진 지 오래다. 아침이면 나무판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두부와 검은 천에 덮여 수줍게 있던 콩나물, 저녁이면 모여 막걸리라도 한 잔 할 수 있던 ‘슈퍼’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은 그 자리를 편의점들이 차지하고 있다.

동네 빵집이 사라지고 커피숍까지 운영하는 재벌들의 탐욕스러운 행태는 분노를 넘어 좌절에 이르게 한다. 재벌들에게 기본적인 생명의 존재법칙인 '더불어 사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다. 

그런데 이들 재벌 공룡들은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주위의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다. 그 끝은 다른 이들을 죽임으로 인해 자신들도 멸종에 이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라는 말이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공자가 제(齊)나라 경공(景公)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오늘날 재벌들에게도 유효한 말이다. 재벌은 재벌다워야 한다. 한국형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그동안 재벌은 재벌답지 못했다.      


밀턴은 ‘실락원’에서 탐욕을 상징하는 악마 ‘맘몬’을 타락한 천사라고 말한다. 재벌이 다시금 천사로 돌아갈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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