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주 별난 세계가 있다.
이곳에서는 연줄이라고 불리는 연(緣)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지연, 학연, 혈연과 같은 연(緣).이 세계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그 뿌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은 혈연이다. 이 이상한 세계에서 혈연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보다 큰 위력을 발휘한다. 이 세계의 사람들에겐 부와 권력의 분산을 막을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장치다.
사방엔 내 재산, 내 지위, 혹은 내 영향력을 탐내는 자들이 많다. 이들로부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킬 장치가 필요했다. 언제부턴가 이들 사이엔 하나의 기발한 수단이 유행처럼 번졌다. 서로 사돈을 맺고 사돈의 사돈은 다시 내 사돈이 된다. 어느 순간 이들 집단은 겹사돈을 통해 거미줄처럼 짜였다.
이 세계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기득권들이 모여 사는 세계다. 그들의 어두운 권력과 그 작동에 이 혈연으로 짜인 네트워크가 그들의 구석구석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다.
‘혼맥’, 고상한 표현으로는 ‘이너써클’이라고 부른다. 직설적인 표현으로는 ‘동종교배’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은 성의 함락을 막기 위해 시작된 혼맥은 ‘내 것’이라는 소유와 함께 시작했다. 사방을 두터운 벽으로 두르고 문마저 걸어 잠근 채 자신들끼리 주고받는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잠긴 문은 제한적으로 열리지만 이내 닫혀버린다. 안에서 벌어지는 리그와 밖에서 벌어지는 리그는 전혀 다르다. 서로 들여다볼 수조차 없는 분리된 사회다.
그 세계의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얻었다는 인식, 절차적 정당성 없이 권력을 쟁취했다는 인식이 자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착취하고 남은 자리에 남은 게 너무 없다는 것이다. 계층 간의 이동을 위한 사다리마저 남들이 오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을 두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은 열린 시스템이 아니다.
경제력은 학벌을 재생산하고 그렇게 재생산된 학벌은 지위를 보장받는다. 그리고 결혼을 통한 새로운 혈연이라는 그물망을 짠다. 결혼동맹을 통해 견고해진 성을 와해시킬 방법은 많지 않다.
외부의 은수저가 금수저로 색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숲 속의 잠자는 공주는 백마 탄 왕자가 깨운다. 나뭇꾼이 공주의 잠을 깨우는 동화는 이들에게 매력이 없다.
권력과, 지위, 돈이라는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할 때 계약이 성립하고 연결하는 줄이라도 잡을 수 있다.
18세기 영국의 풍자화가 윌리엄 호가드는 이러한 네트워크 계약의 한 단면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소 해학적이고 과장이 포함된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상류층에 만연한 결혼동맹의 세태이다.
그의 그림에서 파산을 앞두고 있는 백작과 신분상승을 노리는 부유한 상인간의 거래를 이야기한다. 그 거래란 결혼을 통한 서로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이다. 탁자 오른편에 거만한 자세로 자신의 집안을 이야기하는 백작, 돋보기로 족보를 보며 이를 확인하는 상인, 그리고 이들의 계약서를 건네며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중개인이 있다. 백작의 앞에는 상인이 딸의 지참금으로 가져온 금화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런데 왼쪽 결혼 당사자들은 서로 등을 돌리고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신부는 나중에 정부가 될 남자 변호사 앞에서 우울해하고 신랑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에 빠져 있다.
창문 너머로는 백작이 짓다가 자금이 모자라 중단된 저택이 보인다. 이 결혼이 성사되면 백작은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상인은 미래 백작부인의 아버지로 상류층으로 편입할 것이다.
물론 이 결혼은 성사된다. 결혼의 성사와 행복은 별개의 문제다.
이 그림은 긴 드라마의 첫 번째 그림이다. 호가드는 여섯 개의 작품에 사랑 없는 남녀가 바람을 피워 남자는 죽고, 여자의 집도 몰락한다는 내용을 담아 그 시대의 모습을 풍자했다.
미국에서도 이러한 동맹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 있다. 월 스트리트의 전설로 알려진 은수저 출신의 레너드 제롬이다.
주식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 그가 자신의 부자놀음의 극대화를 위해 선택한 것은 둘째딸 제니 제롬의 결혼이었다. 그는 딸에게 자신은 갖지 못한 고귀한 신분을 선물하고 싶어 했다.
당시 유럽에는 생활고를 겪는 귀족들이 많았다. 산업화로 시대가 급변하면서 토지만으로는 품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귀족들이 선택한 방법은 미국의 돈 많은 집안의 딸들을 며느리로 들이는 것이었다.
19세기 미국의 부자들과 유럽의 귀족들 간에 혼맥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시작이 바로 제니 제롬의 결혼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붙은 별명도 ‘오리지널 달러 공주’였다.
제니에게 귀족의 신분을 만들어준 가문은 처칠 공작 가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가문의 둘째 아들로 작위나 영지를 상속받지 못했지만 ‘고귀한 혈통’이라는 이유로 결혼에 성공한다. 돈과 신분이 결합하자 돈의 힘은 또 다른 방향으로 작용한다. 바로 권력이다. 그녀의 남편은 37살의 나이에 하원의장 겸 재무장관에 오르기도 한다.
제니 제롬과 처칠 가문의 결혼동맹이 신분의 상승을 위한 것이었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거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동맹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전 프랑스 왕비 아키텐의 엘리너(Eleanor of Aquitaine)의 결혼이다. 그녀의 결혼은 거의 막장 수준이라 할 정도로 혼맥을 극대화한 경우다.
엘리너는 15살에 엄청난 영지를 상속받아 당시 유럽의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그녀의 영지는 프랑스 국왕의 영지보다 더 넓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는 상속받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혼한다. 그런데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이혼하고 만다. 그녀가 다음으로 선택한 사람은 영국의 11살 연하의 헨리 왕자였다.
그녀의 결혼이 막장으로 가게 된 것은 자신의 딸의 신랑감으로 점찍어둔 인물이 바로 헨리 왕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혼 서류의 잉크도 마르기 전인 단 몇 주 만에 전격적으로 재혼했다. 어쨌든 그녀는 두 번의 결혼으로 열 명의 자녀를 둔다. 즉 프랑스 왕비로서 딸 둘, 영국 왕비로서 아들 다섯에 딸 셋을 낳았다.
그녀의 두 번에 걸친 결혼 이후 82세로 사망할 때까지 남편의 바람기와 자식들 간의 불화, 부자간의 대치 등 많은 일을 겪지만 그래도 그녀의 재산은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사후 결국은 영토 분쟁이 일어났고, 이것은 백년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영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그녀의 이름이 등장한다. 영국 왕실사의 최대 막장 이면서 가장 핵심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왕실뿐만 아니라 상류층의 대다수가 이러한 정략적인 결혼을 택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보면 그 배경이 됐던 18세기 영국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영국은 가문, 신분, 재산의 정도에 따라 사회적 위상이 촘촘하게 결정되는 계급 사회였다.
귀족들이 정략결혼을 했다면, 시골의 젠트리 계층 또한 그들 나름의 엄격한 계급질서에 따라 엇비슷한 집안끼리 결혼했다. 이처럼 기존의 계급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이 결혼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혼맥은 계층 사이에서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거나, 기득권을 지켜주거나, 신분의 상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맺어진 동맹이 반드시 사회적 존경을 받는 명문가로 성장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 양반 사회는 철저하게 혼맥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세도정치의 막후에도 이러한 혼맥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나 풍양조씨의 혼맥에 의한 세도정치는 결국 나라를 파산시키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결혼이란 수단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권력을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사람들은 집단마다 존재하고 있다. 자신만의 부나 권력, 지위는 유한하지만 네트워크 되었을 때 그 생명력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종교배가 빚은 비극을 잘 알고 있다.
이 고상한 합법적 메커니즘은 유전학적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는 존속될 것이다. 이것은 기득권들의 혼맥을 이용한 인적 네트워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이나 학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종교배를 통한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조직은 일사분란한 모습으로 비칠 수는 있다. 하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외부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와해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은 가까이 과거 조선시대에 수많은 개혁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고집하다 결국 자멸의 길로 갔다.
역사는 늘 정반합을 통해 균형을 맞추며 발전해왔다.
자신들만의 리그,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한 기득권의 유지와 관리는 본능적인 현상이고 또한 막을 방법이 없지만 역사는 퇴보하게 된다.
또한 외부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그들만의 폐쇄적 사회에서 배제당해 온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기회의 차단으로 이어져 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혼맥에 대해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혼맥을 통한 그들의 사회적 지배력이 커지는 동안 사람들은 더 작아지고 기회마저도 놓치고 만다는 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