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헤이안 시대 수도인 교토.
그 교토의 외곽에 라쇼몽(나생문(羅生門):비단결 같은 삶)이라는 문이 있다.
교토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병들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가 되고, 이들의 시신을 제대로 처리할 곳도 마땅치 않아 사람들은 이 라쇼몽의 문루에 시신들을 내다 버렸다고 한다.
처음 누군가 이곳에 시신을 유기하자 너도 나도 이곳에 유기하기 시작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던데 뭐가 문제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내다 버렸는데 나 하나쯤 더한다고 문제 되겠어?
이들의 자기합리화의 현장을 1950년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영화화한다. 아키라 감독이 주목한 것은 인간의 자기합리화의 속성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영화는 그 합리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추악함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영화의 핵심은 어느 날 밝은 대낮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세 가지 시선, 세 가지의 자기합리화에 대한 이야기다.
아내를 말에 태우고 가던 사무라이가 산적을 만나 그의 아내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산적에게 강간당하고 사무라이는 죽음을 당하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법정에서 잡혀온 산적과 강간당한 아내, 무당의 입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죽은 사무라이, 이들 세 사람의 기억은 모두 다르다.
산적은 사무라이의 아내를 탐하는데 그녀 역시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 후 여인이 사무라이 남편을 죽여 달라고 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서 그 자를 죽였는데, 결투 후에 보니 여인은 이미 달아나 버렸다고 말했다.
이에 사무라이 아내는 강간당한 후 남편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경멸하는 차가운 눈빛이었고, 치욕과 분노 때문에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다.
무당의 입을 통해 말하는 사무라이는 아내가 산적과 통정 후 산적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살인으로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한 산적은 달아나고 아내 역시 달아나버려 홀로 남겨진 그는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나 원작 소설에서 누가 사무라이를 죽였는지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 혹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이런 기억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이들 모두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진실만이 참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억, 동일한 사건이라도 그것을 자신의 입장에 맞춘 해석은 심리학적 용어, ‘라쇼몽 현상’을 낳았다. 자신의 입장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취사선택해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라쇼몽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겪는다.
세월호가 어린 학생들을 어두운 바다 속으로 밀어 넣었을 때 수많은 책임자들은 자기합리화에 급급해 진실을 묻어버렸다. 그들의 합리화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부터,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시도들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월호의 라쇼몽 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이 그림은 인간의 위선과 연민, 공포가 우리를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이 그림은 극한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의 처절함을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감상자들을 분노, 연민, 공포와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1816년에 프랑스 깃발을 단 메두사호는 식민지인 세네갈을 향해 가던 중 암초에 걸려 조난당하고 만다. 급히 선장을 비롯한 신분이 높은 고위 인사들이 구명정에 먼저 올라탔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 사람들 150명은 뗏목을 만들어 타고 그 위에 타고 구명정과 밧줄로 연결해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밧줄마저 끊어버리자 뗏목은 망망대해에서 13일간이나 표류하게 된다. 한모금의 물과 먹을 음식조차 없는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로 물든 싸움이 벌어졌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으며 표류하다가 구출됐지만 결국 살아남은 자는 열네 명.
그런데 먼저 구명정에 올라 살아남은 사람들, 뇌물을 받은 사람들, 선장과 승무원들 모두 자기 합리화에 몰두했다.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는 사람들, 자신은 아무 것도 몰았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비극을 묻으려고만 했다. 자신들의 명예와 치부가 드러나는 상황은 마들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이 이야기는 금기시되다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에 의해 되살아났다.
제리코는 생존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스케치해 대형 캔버스에 서사적으로 풀어냈다.
제리코는 그 책임감에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려 1819년 살롱에 출품했다. 이 그림을 접한 파리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감춰지는 듯했던 이 사건은 단순한 선박사고가 아닌 가진 자들의 부패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에 대한 비판은 거세게 일었고 자신들만 살겠다고 구명선을 독차지한 이들과 자기합리화로 빠져나가려던 이들의 행태는 도마 위로 올랐다. 이후 메두사호는 ‘무능한 공권력과 가진 자들의 치부가 드러난 사건’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세월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제일 먼저 튀어 나온 말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자기들끼리 놀러 가다 죽은 걸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지?”라고 말하던 이들.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재난컨트롤 타워가 아니라고 말하던 이들.
자기합리화는 상황논리로 뒷받침되기도 한다.
토마스 홉스의 우려가 우리 시대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상황논리에 따른 자기합리화’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상황논리는 욕망과, 나태, 무능을 가리는 장막이 된다.
과거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재판에 넘겨진 친일파 춘원 이광수의 재판정에서의 언급은 이러한 상황논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병자호란 때 어떠했던가? 청나라로 끌려가 몸을 더럽힌 사대부 여인들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모두 홍제동에서 깨끗하게 씻겨 집으로 돌려보낸 다음 그들의 더럽혀진 정조를 불문에 부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친일파 숙청을 운운하는 것은 결국 공산당에 동조하는 거나 다름없다.’
기이한 자기합리화다. 청나라로 불가피하게 끌려간 여인들의 정조를 묻지 않은 것처럼, 일제에 불가피하게 협력한 자신의 친일행적을 더 이상 논하지 말라는 것이다.
춘원 이광수가 그랬던 것처럼 상황논리를 내세워 당당해 하는 사회는 토마스 홉스가 그토록 경계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흐르게 된다.
모두가 어지러운 세상이다.
자기 합리화가 전염병처럼 세상을 덮치고 좀처럼 물러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제 전염병 수준을 넘어서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토착병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