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물은 파랗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란 색깔을 띠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 즉 파란 물을 있는 그대로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 네덜란드인들에게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 된 그림이 있다.
17세기 바로크 미술 거장 페테르 루벤스의 그림 ‘시몬과 페로’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보는 사람에 따라 두 가지 관점으로 보게 된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영락없는 포르노성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 속에 흐르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에게 이 그림은 ‘성화’(聖畵)이다.
그림은 피상적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틀림이 아니란 교훈을 준다.
‘로마인의 자비’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처음 세상에 선보였을 때만 해도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쟁을 부르기도 했다. 그림을 얼핏 보면 외설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작품 속 두 인물의 나이 차이나 행위는 정상적이지 않다. 그런데 그림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성스러운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이다.
감옥 안에서 손과 발이 묶인 채 있는 한 노인을 향해 젊은 여인이 앉아 있다. 그녀는 상의를 풀어헤치고 가슴을 밖으로 내놓고 있고 노인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의 젖을 빨고 있다. 여인은 노인에게 젖을 물리면서 얼굴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혹시 누가 들어오지나 않을까 불안한 듯 밖을 향해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관음증 환자처럼 창문 뒤에서 몰래 이들을 훔쳐보고 있는 두 명의 병사들 표정도 눈길을 끈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두 남녀 간의 변태적이고 외설적인 모습이다.
이 그림의 소재는 로마의 역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기억할 만한 언행들>에서 가져온 한 일화이다. 그림 속 노인 ‘시몬’은 로마 제국에 저항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에게 내려진 사형의 방식은 아사형. 즉 굶겨 죽이는 형을 선고 받아 아무것도 먹지 못하도록 했고 음식물의 반입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출산한 직후인 딸 페로가 면회 때마다 몰래 자신의 젖을 아버지에게 먹여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녀는 불안과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모유를 아버지에게 먹인 것이다.
간수의 눈을 피해 아버지에게 젖을 물리는 시간동안 여인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스럽고도 불안한 마음이 여인의 표정에 고스란히 표현돼 있다.
이들의 사연을 들은 로마 권력자는 페로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에 감동해 시몬을 석방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사람들이 외면한 것은 보여지는 상황이 보수적인 시대와 맞지 않게 변태적인 성묘사를 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었고 그 이면에 흐르는 진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편견의 대가는 컸다. 이 작품을 그리고 루벤스는 화가로서의 인생에서 내리막을 달리게 된다.
사실이 항상 진실과 같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육체의 눈으로 보고, 진실은 정신의 눈으로 본다고 한다.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으며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왜곡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우다. 진실은 얼마든지 감춰지고 조작될 수 있다.
'개가 꼬리를 흔들다'를 뒤집은 말인 '왜그 더 도그(Wag The Dog)'는 '꼬리가 똑똑하면 개를 흔들 수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의 성추문을 덮기 위한 전쟁을 그린 미국 영화로 이 `왜그 더 도그'가 있다. 미디어를 조작해 국민을 현혹하는 것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영화의 내용은 대통령 선거 2주 전 터진 스캔들로 재선이 어려워지자 백악관 참모진들이 헐리우드의 영화기획자들을 동원해 기상천외한 미디어 조작을 감행한다. 미국민들에겐 생소한 나라 알바니아와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연일 보도한다.
여기에 영화 기획자들이 영화적인 테크닉을 이용해 전쟁의 상황을 재현했고 이는 기정사실인 것처럼 여러 매체를 통해 퍼진다.
그들의 예상대로 국민들의 관심은 전쟁으로 쏠리고 대통령의 스캔들은 잠잠해진다. 그 결과 압도적인 표차이로 재성에 성공하게 된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하는 4대 우상론은 이러한 인간의 오류를 경계하고 있다.
영화 속 미국의 대중들은 '우상'에 빠져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진실을 감추기 위해 조작된 환영은 극장의 우상을, 실체를 알려하지 않고 무조건 믿어버리는 매스컴과 대중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동굴 안의 우상에 빠져 있다.
보이는 것만 믿는 것, 권위 있는 인물이나 매체에 전적으로 의지해버리는 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우리가 진실에 대해 얼마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두 작품이 있다. 어찌 보면 같은 장소에서 그려진 듯한 두 모습이다.
추수가 한창 진행 중인 들판은 하늘의 축복과 풍요로 행복에 젖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추수를 마친 구역의 세 여인에게서 그러한 행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허리를 숙이고 추수 후 남은 이삭을 줍는데 열중하고 있다.
그림 속 공간은 목가적인 풍경이어야 함에도 그들에게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만끽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어떤 극적인 사건을 묘사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항상 해오던 일처럼 자연스럽다.
작가는 이들 세 여인을 묘사하면서 특별히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끌어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참한 일상을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제목이 ‘추수’가 되지 못하고 <이삭줍기>가 된 것도 풍요로운 추수로 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아닌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수확을 마친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세 여인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도록 구도를 잡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아 있는 밀 이삭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굶주린 사람은 너무 많아 한 사람당 주워갈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이 열심히 일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알갱이 하나라도 더 모아야 그날 먹을 빵이라고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밀레의 <이삭줍기>보다 2년 후에 그려진 쥘 브르통(Jules Breton)의 <이삭 줍는 여인들의 귀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주들이 은혜를 베푸는 모습과 행복한 얼굴로 들판을 떠나고 있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오후의 황금빛 석양이 나무 뒤로 빛나는 웅장한 전원 풍경 속에서 그 날의 수확을 가지고 여인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들의 남루한 복장과 대비되는 세련된 옷차림에 칼까지 찬 남자는 이제 나오라고 외치는 듯하다. 아마도 대지주의 토지 관리인 쯤 되는 사람일 것이다. 추수가 다 끝난 대지주의 밭에서 바닥에 흩어진 지푸라기를 주우러 온 가난한 농민의 모습이지만 그림은 대지주의 은혜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두 그림에서 하나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두 해석을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현실에 대한 두 가지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두 줄기의 사실의 강이 흐르고 있다. 눈으로 보여지는 사실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사실.
구반문촉(毆槃捫燭)이란 말이 있다. 장님이 쟁반을 두드리고 초를 만져본 것만 가지고 태양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실체적인 진실과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세기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 정보가 흘러넘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본질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