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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Apr 04. 2019

지성을 잃어가는 사람들

지성을 잃어가는 사람들     


‘3S정책’이라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행태를 비판하던 용어가 있다. ‘3S’란 스크린(Screen·영화), 스포츠(Sport), 섹스(Sex) 또는 스피드(Speed)에 의해 정치적 무관심을 이끌어 내는 정책을 말한다. 권력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우민(愚民)정책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3s 정책의 일환으로 생긴 프로야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우민화 정책은 방송이 깃발 앞세우고 선동하는 느낌이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형식과 소재가 약간씩 달라질 뿐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바야흐로 지금 시대는 먹방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음식과의 사투라도 벌이듯 입안에 쑤셔 넣고 이를 보며 시청자들은 즐거워한다. 무심코 지켜보다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하는 회의가 든다.

그 프로그램들은 윤리적 측면에서는 포르노와 다를 것 없는 수준으로 식욕과 뇌간의 본능만을 자극한다.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사막화가 확산되고, 이로 인한 식량의 원천이 되는 농경지마저 황폐해지고 있다. 인간의 무리한 욕심으로 바다마저 서서히 죽어가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오는 타격은 식량일 수밖에 없다. 방송에서 아무렇게나 소비되는 음식들이 전파를 타는 동안 도처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있다. 이른바 ‘폭식 방송’을 시청하다보면 이러한 진실은 설 자리가 없다. 

음식 얘기지만 엄밀히 말해 한국의 소멸되어 가는 정신과 윤리의 문제다. 로마 최고 지배계층이 탐식(貪食)의 문화를 포장해 ‘미식(美食)’으로 미화시켰듯이 먹방으로 대표되는 우민화 전략은 결국 시대정신을 상실케 한다.      

음식 먹는 것을 오락으로 여기는 이 기괴한 의식은 한국의 전통 사회에는 없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음식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결코 음식을 함부로 다루지도 않았다. 


유교의 가치가 반영된 한국의 음식문화는 ‘조화와 예’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은 자신의 영양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은 물론 제사의례와 손님접대를 통해 음식을 나누는 도구라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나누는 정신이 바로 조화와 화합의 정신이었다. 요리 과정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연결된 윤리적 삶의 일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음식이 주는 교훈을 안다면 우리는 음식과 삶에 대한 오만에서 벗어나 좀 더 소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먹방 앞에서 정신의 공백을 메우려고 시도하던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그림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작품이다.

고흐는 자신의 고향에 머물면서 그동안 자신이 떠돌며 생각한 것들과 경험을 모두 동원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었다. 

고흐, 감자를 먹는 사람들

그림은 그의 첫 번째 걸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작품이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후 자신의 그림에서 나타날 경향이나 사상이 모두 이 그림에 담겨 있었다. 

소박한 나무식탁 하나를 둘러싸고 앉아 있는 사람들, 간신히 식탁 주변만을 비치는 램프 하나. 그 램프의 불빛을 받으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린 고흐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고마움을 아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둡고 탁한 색채는 단지 회화적인 효과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철학적인 생각들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를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1885년 일기)      


감자를 먹는 그 손으로 그들은 땅을 일구고, 감자를 심고, 감자를 거뒀다. 예술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농부처럼 뿌리고, 뿌린 대로 거둘 뿐이다. 농부들의 손처럼 화가의 손이 정직할 수 있다면! 농부들의 정직한 식사만큼이나 그림 또한 정직할 수 있다면!     

 

그는 소박한 전원생활을 그리고 싶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고흐, '감자 바구니'

그는 갈색의 얼굴들을 그리면서 감자에 묻어 있던 흙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땅을 일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화가 자신의 모습 사이의 거리를 없애버렸다. 

완벽한 일치감이다. 특히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손을 통해 그저 황폐하기만 한 가난을 본 것이 아니라 꾸밈없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본 것이다. 


노동을 통해 정직하게 얻은 그 음식에서 그는 혁명적인 진실을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고흐는 땅을 파는 도구가 되어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으로 자신들이 거둔 감자를 먹는, 그 한순간의 식탁을 그리기 위해 농부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들의 성스러운 교감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물감을 덧바르며 최선을 다했다.


고흐는 이 그림을 두고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을 그리고 싶었다. 그 손은 그들이 땅을 판 손이기도 하다. 농부는 목가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그들 특유의 거친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하다. 시골에서는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는, 먼지가 뒤덮인 푸른 옷을 입은 처녀가 숙녀보다 멋지다.”      

네덜란드 시절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그림은 가난한 민중의 현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애와 가족애를 담고 있다.       

고흐, 감자를 깎는 여자

우리는 고흐의 소박한 저녁 식사에서 ‘폭식 방송’의 표면 아래에 잠복해 있는 슬픔에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다. 생각 없이 음식을 밀어 넣고 있는 출연자는 영혼 속의 깊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 게임, 유투브 영상, 쇼핑 또는 음란물을 보면서 정신의 공백을 메우려고 시도하던 많은 사람들과 오버랩된다.      

오늘날 우리는 생생한 이미지들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이미지들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뇌는 산산이 부서진 생기 없고 창백한 모습이다. 그 일차원적인 이미지들은 진실을 전달하거나 논리에 호소하지 않는다. 복잡한 윤리의 탐구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편도체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집단으로 반(反)지성 문화에 깊이 빠져들고 있다.      


‘3S정책’의 우민화에 빠져들면 모두는 그저 에리식톤처럼 지성이 붕괴된 집단이 된다. 지성의 붕괴는 시스템에서 소모적 부품으로 남게 된다. 


무의미한 것에 대한 탐욕, 절제되지 못한 의식, 이 모든 것은 비판적 수용을 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반지성은 항상 인간을 허기지게 한다. 우리의 뇌는 그러한 것에 충족감을 주는 장치가 없다. 이는 에리식톤에게 내린 저주와 같다.     


고대 그리스 테살리아의 왕 에리식톤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바쳐진 나무를 함부로 베어 벌을 받은 사람 이야기다. 분노한 데메테르는 굶주림의 여신 리모스한테 부탁해 에리식톤에게 허기를 불어넣게 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에리식톤은 음식을 닥치는 대로 밀어 넣는다. 먹을 게 바닥나자 가족까지 모두 노예로 팔아서 음식을 사 먹는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자 자기 몸까지 먹어 치워 결국 이빨만 남게 된다. 그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때문에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 것이다. 

딸을 파는 에리식톤

결국 허기는 우리의 반지성을 극대화시킬 뿐이다.     


우리가 핵 위협, 기후 변화, 급격한 부의 집중 등의 사회적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반지성 문화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 분석이나 사적 삶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방식을 경시하는 풍조에 빠졌다.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지만, 문명을 발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스스로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감소시키는 방식으로 우리의 두뇌를 자극하고 있다. 기술적 부가 기능에 의한 정서적 반응이 권장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적 접근 방식을 사용할 능력을 잃게 될 경우, 결국 우리 모두는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시민들이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다. 오늘날 고등교육을 받은 많은 이들이 경박한 장난으로 인해 길을 잃게 된 것을 목격한다. 우리는 여기서 ‘과거의 규범은 억압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닌 도덕적 명령’은 아닐까 하고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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