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은 신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신랄하게 비판한 책이다. 이 책은 한때 한국 사회에서 엄청난 반발과 환호를 동시에 받았다.
그럼에도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쓴 <에덴의 강>이란 책은 상대적으로 주목이 덜했다. 내가 이 책을 주시하게 된 것은 그의 독특한 은유 때문이다.
서로 교배가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종(種)으로 발전하기까지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하다. 무려 40억년이라는 긴 강의 시간이다. 그리고 강이 흐르면서 쪼개지고 갈라지는 것처럼 수많은 새로운 종이 나타난다.
인간 역시 지금까지 유인원으로부터 25개 이상으로 나뉘어 나타난 종 가운데 하나다. 최근에도 현생인류의 모습을 모두 갖춘 새로운 인류 종이 필리핀에서 최초로 발견됐다고도 한다.
‘호모 루소넨시스’라 불리는 이 종은 현생인류와 비슷한 구강 구조를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치아 뿌리 부분의 형태가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와 다르지만 호모 사피엔스 범주 안에 있다.
25개 이상의 인류와 같은 뿌리를 가진 종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지금의 인류 빼고는 모두가 멸종했다는 사실은 더 놀랍다. 기원전 2만 5000년경에 이르러 지구상에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사라지고 현생 인류가 유일한 인류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멸종은 종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변화에 의한 것이다. 인류의 여러 종들도 이러한 환경변화에 의해 종의 대가 끊어졌다. 여기에는 빙하기, 경쟁, 자연재해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어쩌면 멸종은 모든 생물의 미래 운명일 것이다. 생성과 소멸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가 멸종해서는 안 되는 특수한 종으로 여긴다.
오히려 어느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거라는 자신감만이 가득하다.
인간의 자신감은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의 지구는 인간에 의한 급격한 환경 변화로 6번째 대멸종이 진행 중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게다가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진화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월전 장우성(1912-2005)의 그림을 보다보면 인간의 잔인함에 경악하게 된다. 병들어 죽기 직전의 비참한 모습의 학은 어쩌면 인간에게 곧 다가올 거울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오염지대’란 이 작품에서 인간에게 경고하고 있다. 작품이 제작된 년도가 1979년이니 그 경고가 40년째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작품에서 학의 모습은 처참하다. 배경마저 그런 학의 모습처럼 칙칙한 색이다. 고고함의 상징인 학이 날개를 늘어뜨리고 힘없이 앉아 있다. 하늘을 날았던 기억마저 잃은 채 죽어가고 있다.
수묵화의 아름다운 풍경과 마음을 울리는 시 대신 작가는 죽어가는 학과 인간에 대한 경고의 글을 남겼다.
인간은 자신들의 삶의 편안함을 위해 대지의 주인들로부터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고 있다. 약탈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생물들이 멸종에 이르게 할 정도의 환경파괴는 결국 인간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멸종을 알리는 전조들은 세계 각지에서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얗고 동그란 외모가 주는 친근함과 코카콜라 CF와 여러 영화 등에 노출되어 전 세계에 많은 팬을 보유한 북극곰을 보자.
기후변화와 지구 온난화는 이들의 생태계를 대부분 파괴했다. 북극의 동토층이 녹아내리면서 생존을 위한 터전과 먹이 사슬이 끊어져 멸종 위기에 놓인 것이다.
거기에 ‘서식지 개발로 인한 자연 파괴’는 이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된다. 북극의 천연자원 매립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이를 개발하기 위한 각국의 경쟁 또한 치열하다.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석유 유출은 곰의 체온을 지켜주는 털의 보온 효과를 떨어뜨린다. 독성 물질은 이들에겐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온난화는 해양 생태계도 위협한다. 온실가스 방출로 촉발된 바닷물 수온 상승이 2100년 안에 해양생물의 파멸적 손실과 해양 먹이사슬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현재 추세라면 바닷물 수온이 평균 2.8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렇게 되면 해양생물 중 상당수는 이를 견디지 못한다. 아마도 이른 시간 안에 해양 생물의 다는 아니어도 상당수는 잃게 될 것이다.
지구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온난화뿐만 아니다. 토양과 수질의 오염 역시 인간의 생활 환경과 개발에 의해 가속도가 붙고 있다.
2000년도에 제작된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에린 브로코비치’라는 영화는 이러한 재앙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보여준다.
1993년 법률회사의 말단 사무보조원 에린 브로코비치는 힝클리 주민과 PG&E 사이의 소송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녀는 힝클리의 PG&E 공장 인근 주민들의 소송 사건 파일을 우연히 보게 된다. 그러다 그들 중 한 명의 백혈구 수치가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내 힝클리 주민 상당수의 혈액에서도 같은 현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냉각탑 부식 방지제였다. 그 부식 방지제에는 발암 물질인 ‘6가 크롬’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PG&E는 무단으로 이를 방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무단 방출은 40년 이상 계속되었고 ‘6가 크롬’이 포함된 폐수는 지하수로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 지하수는 힝클리 주민의 식수원이었다.
오염된 식수로 인해 주민들은 잦은 코피와 소화기 이상, 암 등을 일으켰다.
지금은 생태학계의 고전이 된 <침묵의 봄>에서도 이러한 토양과 수질 오염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 레이첼 카슨은 1950년대 뉴잉글랜드 지방의 새들이 떼죽음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해충 방재에 쓰는 DDT였다. 이를 조사해 DDT의 문제를 확인하고 책으로 남기기로 한다. 그녀가 이 책을 준비하는 5년 동안 화학산업계와 싸우면서 십이지장궤양과 유방암과도 싸워야했다.
그녀가 <침묵의 봄>을 출간했을 때 미국 사회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몬산토 사’는 <침묵의 봄>을 패러디한 ‘황량한 시대’라는 책을 내 ‘DDT를 안 쓰면 병충해 때문에 기아와 질병이 만연한 세상이 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다행히 미국 일반 시민들은 레이첼 카슨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비록 그녀는 책이 출간되고 2년 만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다.
레이첼 카슨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전하고 있다.
고야가 말한 괴물은 그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고야의 <거인>이란 제목의 그림은 자신들 앞에 놓인 현실에 대해 무감각해지거나 외면할 경우 치르게 될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고야는 괴물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 무감각해지고 일상처럼 비극을 받아들이면서 무기력해질수록 야만의 거인은 더 크게 자란다는 것이다. 당시 현실에 대해 체념하는 태도가 가져올 비극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폭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는 무시무시한 거인이 주는 위압감을 견뎌내기엔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도 나약하기만 하다.
거인에 짓눌린 사람들은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하게 만든다.
고야는 약한 인간을 억압하는 거인을 상상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약한 인간이 이 땅 위에서 ‘거인’으로 살고 있다.
지금 그 거인은 자신의 몸보다 몇 배 큰 물체라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는 팔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도 수천 킬로미터나 계속해서 달릴 수 있는 다리를 가지고 있다.
지금껏 어떤 새들도 오르지 못했던 곳까지 그를 데려다줄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고, 바다 속 어떤 물고기보다도 빠르고 유연하게 물속을 헤엄칠 수 있는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에게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 있거나 어둠에 가려져 있는 물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며, 세상 어느 구석에서 속삭이듯 말하더라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
그동안 자신들의 앞을 막고 있던 산도 더 이상 그에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나이아가라의 엄청난 폭포라도 능히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옛날처럼 땅에서 주는 것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자신의 힘으로 다스리게 되었고, 거대한 숲을 만들고, 바다와 바다를 연결하고, 황량한 사막에도 물을 끌어들여 자신들이 머물 땅으로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