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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Jul 31. 2019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자기'

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한국문화 찾기

일본에서 최고의 보물로 사랑받는 ‘이도다완’.

고려말, 청자가 쇠퇴하고 백자로 넘어가면서 그 과도기에 등장한 사발이 여러 경로로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다완이 되었다. 이도(井戶)는 일본 사무라이의 성(姓)씨에서 따온 이름으로 서일본 지역에서 말차(抹茶)를 마시는 데 사용한 찻사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막사발이었던 이도다완. 원래 조선에서 그 용도가 국그릇이나 막걸릿잔, 찻잔과 같은 생활자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막사발 ‘이도다완’이 일본의 차문화를 완성한 센노리큐(千利休)에 의해 일본의 보물이 되었다. 

이도다완

막사발이 일본에서 보물이 된 것은 대칭의 형태만을 추구하던 이전의 일본 찻잔과 달리 전혀 새로운 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거칠면서도 자유분방하고, 비대칭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은 낯선 아름다움이었다.

막사발은 유약 성분도 제각기 다르고 그 두께도 고르지 않다. 그 흔적은 사발의 밑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마치 가죽과 같이 오돌토돌한 거친 면은 낮은 가마 온도로 유약이 잘 녹지 않아 생긴 것이다. 센노리큐는 그것조차도 새롭고 아름답다고 말했다. 인위성을 찾을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서 새로운 미를 보게 된 것이다.


센노리큐는 이 사발을 보고 “찻잔 안이 마치 작은 옹달샘을 보는듯하다”라며 그 자연스러움에 감탄했다고 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지만 기교를 배제함으로써 나오는 순수한 아름다움에 감탄한 것이다. 그들이 보아온 매끈하고 정교하면서 대칭을 이루는 이전의 찻잔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신의 그릇, 이도다완


일본에서 이 다완을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신의 그릇’이라 하여 성(城)과도 안 바꾼다는 말을 탄생시킨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일본 전국시대, 이도 와카사노카미(井戶若狹守)라는 사무라이가 자신의 주군 쓰쓰이 준케이(筒井順慶)에게 그가 가장 아끼던 이 사발을 바쳤다. 쓰쓰이는 이것을 올린 사람의 성(姓)이 이도(井戶)라 이도다완이라 불렀다.

나중에 쓰쓰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미움을 받아 성을 빼앗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성을 지키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이도다완을 도요토미에게 바쳤고, 도요토미는 쓰쓰이를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명품 이도다완은 성(城) 하나와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이 이도다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장한 절의 수리를 위해 경매에 내놓아 일본 경매 사상 최고의 금액에 낙찰되기도 했다. 단순한 사발 하나일지 모르지만, 일본의 수집가들에게 이 사발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에서의 한국 막사발에 대한 애정은 심하다 할 정도로 지극하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그들의 또 다른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대표 문화는 ‘차문화’라고 한다. 무사들 사이에서는 차를 마시며 마음을 정제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가 공은 세우면 영주로부터 그 공을 치하하는 선물을 받는데 그 중 으뜸이 조선에서 넘어온 다완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차 스승을 따로 두고 조선의 다완을 수집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생각했다.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이런 차문화를 사랑해 전쟁까지 일으켰다. 그는 조선 출병을 결정하고 원정군에 특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조선의 도공을 비롯한 장인을 잡아 오란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 비친 조선은 ‘이도다완’을 만들 정도로 도자 기술에서 앞선 나라였다. 지금도 다완은 물레 성형이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런 다완을 만들 정도의 기술을 가진 도자 장인들이 훗날 일본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반면 한국은 이에 대한 전통 기술뿐만 아니라 남아 있던 200여 점의 전통 막사발조차 모두 일본에 빼앗겼다. 이렇게 전쟁까지 불사하며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간 것이 그들에겐 새로운 기회였다. 아마 일본인들도 도자 기술이 문화적 융성을 가져올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최첨단 기술을 빼앗아간 셈이다. 


백색의 보석을 찾아서


일반적으로 그릇은 문명의 발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5000년 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시작한 인간의 문명은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이 발전의 과정은 자연 극복의 과정이었다. 그 극복의 첫걸음이 도기에서 자기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자기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과학적 발견들도 이루어졌다. 

고대 문명 이래 그릇은 뭔가를 담는 것 이상이었다. 오늘날 그릇의 발달 과정이 인간 문화의 진보와 궤를 같이해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의 유적을 보면 돌이나 자연에서 구한 재료로 만든 그릇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경우 타조알의 한쪽을 자르고 청금석으로 장식해 그릇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릇의 수명이 짧아 대안으로 돌에 홈을 만들어 그릇으로 사용했다. ‘알라베스트’라는 돌로 만든 그릇은 만들기도 힘들었지만, 그 무게도 상당했다. 이런 부류의 그릇은 이집트에서도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이집트 파이앙스 도기 (사진_이집트 카이로 박물관)

어느 문명이나 청동기 시대 이후 흙으로 빚은 그릇이 있었지만 물기 있는 음식을 담을 수는 없었다. 그릇에 물이 스며들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문명이 진보하면서 흙으로 빚은 그릇을 불로 구워내는 방법을 알게 되지만 이번엔 온도가 문제였다. 당시 고대인들이 끌어올릴 수 있는 최고 온도는 800도 정도였다. 이 온도에서는 그릇이 단단해지긴 하지만 물에 담그면 본래 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 한계에도 고대 사람들은 흙 그릇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작의 측면에서 그 이상의 재료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물을 흡수하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단단한 그릇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모든 문명에서 이러한 흙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고민을 맨 처음 해결한 나라는 중국의 송나라였다. 

그들은 어떤 흙을 어떻게 굽는가에 따라 그릇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그릇을 굽는 온도는 그릇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찾아낸 기준은 섭씨 1100도였다. 도기에서 자기로 넘어가는 변곡점이었다.


당시 유럽의 몇몇 문명의 기술 수준으로 보면 이 정도까지 열을 끌어올리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철기 문명의 선구자였던 히타이트는 철을 녹일 정도로 불의 온도를 올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릇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히타이트가 자기에 이르지 못하고 도기에 머문 것은 흙의 차이였다. 높은 온도에도 견디는 흙이 그들에겐 없었다. 

히타이트 도기 (사진_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온도와 흙, 이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킨 것은 중국 문명이었다. 중국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보다 문명의 출발은 늦었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그들에게 한계란 끊임없는 도전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역시 다른 문명들처럼 물이 스며들지 않는 그릇을 찾고 있었다. 발견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을 것이다. 도공들이 모래사장에서 모닥불을 피우다 모래가 유리로 변하는 것이 발견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거기에서 착안해 도기에 유리의 원료인 석영을 바르기 시작했던 것이 시초다. 

유약의 원시적인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유약은 불에 굽는 과정에서 높은 온도를 받으면 유리질로 변한다. 이 유리질이 그릇으로 수분이 침투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준다. 


첫 과제가 끝나고 이제 높은 온도에서 견디는 흙을 찾는 문제가 주어진다. 그러한 흙은 보통 암반 아래로까지 내려가야만 한다. 중국의 도공들은 이러한 채굴 과정과 흙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법까지를 알아내고 체계화시켰다. 이 흙은 기존의 흙보다 점성도 좋고 섬세한 성형도 가능케 했다. 

더욱 높은 온도에도 견디는 흙의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가마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들은 열이 위로 올라가는 것에 착안해 계단 모양의 폐쇄된 가마를 생각해냈다.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새로운 가마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높은 온도는 유약의 성질뿐 아니라 그릇을 만드는 흙의 성질까지 변화시켰다. 1,250도를 지나면 액체와 고체의 중간 상태로 되었다가, 식으면서 물을 흡수하지 않으면서 가볍고 단단한 자기로 변화하게 된다. 마침내 자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만들어낸 첫 자기는 청자였다. 산소를 차단하는 방식이 자기의 색을 푸른빛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의 초기 자기 (사진_중국이싱도자박물관)

이제 그들에게 남은 숙제는 하얀색의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백색 유약만으로는 하얀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도공들이 백색에 집착하게 된 것은 원나라의 영향이다. 특히 몽골이나 같은 계통의 한국의 경우 흰색의 숭배가 어느 민족보다 강했다. 이들 문화에서 흰색은 순수함의 상징이다. 몽골이 중국을 통일하고 백색 자기에 대한 열망이 강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한 백색 자기의 꿈은 중국 ‘징더젠’이란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백색 자기가 가능했던 것은 양질의 고령토가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화강암이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고령토는 오늘날까지 도자기의 주재료로 쓰이고 있다. 기존의 청자가 갖고 있던 푸른 기운을 뺀 순백자는 중국 문명뿐 아니라 세계 문명을 통틀어 가장 큰 발견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유럽에 알려졌다. 하지만 유럽의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마르코폴로를 향해 ‘허풍쟁이’라는 비아냥 섞인 별명까지 붙여줬다. 


그런데 원이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중국의 문명은 자연스럽게 이슬람을 거쳐 유럽으로까지 넘어가게 된다. 백색 자기 또한 그 여행길에 동행했다. 이 시기 최초로 유럽에 들어온 자기 <폰트 힐 베이스>를 마주하고서야 마르코폴로의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인정했다. 이 자기는 징더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거쳐 지금은 아일랜드에 정착했다. 당시 유럽의 사람들은 이 단단하고 매끈하며 가벼운 자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현대 용어로 자기를 뜻하는 단어로 ‘China’가 된 것도 이때였다. 

폰트 힐 베이스

이후 유럽에서 자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자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자로 인식되었다. 큰 도자기 하나가 지금의 가치로 쌀 200석과 맞바꿀 정도로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왕실이나 부잣집의 벽면은 명화 대신 백자로 장식되었다. 특별히 자기를 위한 방을 만들 정도였다. 유럽에서의 이런 자기 열풍으로 명나라 시절 자기는 세계 무역에서 최고의 상품이 되었다. 


유럽에서 백자의 광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백색 자기를 열망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러한 도전을 지원한 이는 메디치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 자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연금술사들과 기술자들을 모으고 가마를 지어 본격적인 지원을 했다. 하지만 모든 재료가 이용되었음에도 백자의 색을 내는 데는 실패했다. 흙 자체를 알지 못했던 그들에게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자기에 필요한 가마 온도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도기 기술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 150년이나 지나 독일의 마이센 알브레히츠부르크 성의 두 연금술사가 백자에 대한 비밀을 푸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고령토는 중국의 고령토와 달라 자기 생산에 맞지 않았다. 

고령토만으로 한계를 느낀 유럽의 도공들은 수많은 실험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나라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에서 그 결실을 보게 된다.


영국에서는 흰색을 내기 위해 고령토에 소의 뼛가루를 섞는 실험을 하다 뼈의 성분이 도자기의 재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뼈를 섞은 흙은 틀로 성형하기에 적합했고, 높은 온도가 아니어도 자기만큼의 효과를 냈다. 이렇게 해서 ‘본차이나’가 탄생한 것이다. 


일본을 일으킨 조선의 자기


고대 도기부터 본차이나가 나오기까지 이는 모든 문명 모든 국가에서 사활을 건 사업이었다. 

그러던 사이 중국의 자기 산업은 왕실의 지원이 끊겨 몰락해 가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면서 극도의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농민반란마저 일어나 자기에 대한 지원은 중단되어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앙 정부에서 도자기 수출마저 가로막자 유럽까지 혼란에 빠졌다. 늘어나는 자기의 수요를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상인들은 대안을 찾아야만 했다. 그 혼란의 틈을 파고든 것이 일본 자기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수많은 도공이 데려와 그들에게 계속해서 도자기를 만들게 했다. 조선 도공들의 기술은 이미 중국을 능가하고 있었기에 유럽 사람들을 눈을 끌어당기고도 남았다.

조선의 도공들이 가장 많았던 규수의 영주들에겐 좋은 기회였다. 이들은 일본이 가진 도자 기술을 선보일 장소로 만국박람회를 택했다. 파리박람회와 비엔나박람회는 일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박람회장에서의 일본 도자기(필라델피아 역사자료관)

일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럽의 새로운 기술과 전통 도자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도자기 왕국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메이지 유신’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도자기를 이용해 경제적인 이득만을 취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자기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일본식 문화를 입히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조한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채색목판화다. 이 판화 작품은 유럽에 수출하는 포장지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던 유럽 미술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가 잘 아는 고흐의 일본판화를 모사한 작품에도 이러한 열풍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19세기 판화에서 시작된 일본 열풍인 ‘자포니즘(Japonism)’은 일본식 의상, 생활용품, 도자기로 이어졌다. 유럽은 일본으로부터 선의 간결함과 단순함을 배워나갔다. 중국이 갖고 있던 복잡성과 장식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근대화의 출발선 상에는 조선인들의 한 맺힌 아픔이 있었다. 심수관이나 이삼평 같은 도공들이 바로 그들이다.

남원 출신의 심수관은 일본의 도자기를 국제화한 최고의 조선 도공이다. 일본 신사에 모셔진 일본 백자의 창시자 이삼평, 무사만이 영주로 작위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받은 심해종전(김종전), 그리고 그의 아내 백파선은 아리타 도자기 400년사에 유일하게 이름을 남긴 여성이다.

이들은 조선에서 공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 땅에선 장인으로 대우받으며 살았다. 그리고 일본 영주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일본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나아가 이들의 도자기는 프랑스의 리모주, 독일의 마이센 같은 명품도자기 탄생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심수관이 개창한 일본 사스마도기 (사진_薩摩窯)

일본에서 자기는 조선에서 건너온 것일지라도 오늘날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이 되었다. 반면 한국은 자신들의 전통 기술을 빼앗기고 이를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렀다. 조선의 조정은 명분만 붙잡고 있었고, 식민지 시절엔 힘이 없었다. 해방 이후의 정부는 근대화에만 몰입하다 기회를 놓쳤다. 


밖에서 보면 조선의 자기 기술의 맥은 이미 끊어진 듯 보인다. 그런데 일본인 수집가이자 민예운동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에는 여전히 저력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1910년의 어느 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날 밤 경성의 고물상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조선의 물건들 사이에 하얀 항아리 하나가 전등불 아래 반짝 빛나고 있었다. 은은하게 불룩하고 둥근 이 물건에 마음이 끌려 한참 들여다보았다.’


조선의 달항아리를 보고 쓴 일기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도자기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조선의 보수적인 지도층들이 외면하고 천하게 보았던 자기의 아름다움에 그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다. 

한국인들은 자기 기술의 후진국 일본이 조선의 기술을 손에 넣으려고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만 생각한다. 엄밀히 말해 도공을 데려간 것이지 전통 자체가 흡수해 간 것은 아니었다. 자기의 전통은 여전히 서민들 사이에서 살아 있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의 차이가 있다. 

일본은 한국이 천시하던 것을 보물로 여겼다. 그들은 이 기술로 일본을 세계에 알리고 첨단 산업에서도 이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인류사에 가장 오랜 하이테크 기술이 미래 기술과 만나는데 일본의 조선인 출신 도예가들의 땀이 들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최첨단 우주산업이다. 우주선이 대기권에 진입할 때 생기는 온도가 1,800도이다. 이 온도를 견디는 가장 효율적인 재료가 바로 ‘세라믹’이라 불리는 ‘자기’다. 일본은 그들의 기술을 이용해 첨단 산업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류 원조’ 조선 도자기 기술이 세계 과학계를 변화시키고 있을 때 과연 한국은 자신들의 것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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