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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Jul 31. 2019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홍익사상'

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한국문화 찾기

불교의 『법화경』에 ‘의리보주(衣裏寶珠)’란 말이 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옷 속의 보배구슬’이란 뜻이다. 

경전에 부처님과 제자들에 대한 다음 일화가 나온다. 불교에서 수기란 부처님의 약속과도 같다. 어느 날 부처님이 수행자들이 장차 큰 깨달음을 얻으리란 말을 오백 아라한에 한다. 이들은 이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그동안의 허물을 반성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그동안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그 어리석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지혜가 없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여래의 지혜를 보지 못하고 스스로 작은 지혜에 만족해 왔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에게 친한 벗이 찾아왔는데, 그가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보배구슬을 옷 속에 꿰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취한 채 잠들어 있어 아무것도 몰랐고, 다음 날 일어나 길을 나서 거리를 전전했습니다. 그는 옷과 음식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힘을 다해 찾고 구했지만, 그때마다 몹시 큰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이 비유는 자신의 옷 속에 값진 보배가 숨겨져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어렵고 살며 고초를 겪는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도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보물을 지니고 있지만, 어리석게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것을 나무라는 말이다.


이러한 보물은 개인이나 사회, 혹은 국가, 어디든지 존재한다. 한국인들의 마음에도 존재하고 한국의 역사 속에도 존재한다. 물론 보물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린 초등학생들 ‘숨은보물찾기’ 하듯 찾다 보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하지만 그 보물은 아무나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다. 자신에게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에게 그 보물은 그저 돌멩이에 불과하다.


한국 정신의 뿌리


한국인들의 옷 속에 숨어 있는 그 보물 중 하나가 ‘홍익정신’이다. 

한국에서 ‘홍익’이란 말은 자주 쓰이는 단어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이다. 그 ‘홍익’은 한국 정신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다. 무려 오천 년을 이어온 뿌리다.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해온 것이다. 

홍익정신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유사 중 고조선의 건국 신화다. 


신화에서 하늘의 신인 환인의 아들 환웅은 지상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그는 이 땅에 내려와 직접 세상을 다스리고 싶어 했다.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상의 땅을 살펴보니 삼위 태백산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다 생각했다. 환웅은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데 사용할 ‘천부인’이라는 세 가지 물건과 풍백·우사·운사,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천부인

이곳에서 곡식, 인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두루 맡아보며 인간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환웅은 두 동물의 간절함을 알고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며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곰은 환웅이 시킨 대로 쑥과 마늘만 먹으며 버텨 여자가 됐고, 호랑이는 이를 지키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된 곰은 ‘웅녀’라는 이름을 얻었다. 웅녀는 결혼할 사람이 없어 신단수 아래에서 제를 올리며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고 그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아사달을 도읍으로 한 고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이다.

채용신이 그린 단군초상

이 신화는 토템(Totem_신성하게 여기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 각 부족·씨족·사회집단의 상징물) 사상을 기초로 한 신화다. 곰을 모시는 종족과 호랑이를 모시는 종족 사이의 세력 싸움에서 곰을 모시는 종족이 승리를 거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반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전쟁인 셈이다. 그런데 핵심은 승자가 누구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단군신화는 여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고구려 고분 각저총의 벽화를 보면, 씨름하고 있는 두 사람의 왼쪽에 커다란 나무가 서 있다.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앉아 있다. 나무 밑에는 두 마리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 나무 왼쪽에 호랑이, 그 오른쪽에 곰으로 보이는 동물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신단수 아래로 모여든 곰과 호랑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각저총 씨름도

이번에는 고구려 장천 1호분을 보자. 이 무덤은 1970년대 중국의 지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벽화는 보리수 아래 석가모니라는 학설도 있지만 최근 단군신화를 다루고 있다는 학설이 우세를 보인다. 단군이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오른쪽 하단부의 동굴은 검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동굴 안에 곰으로 보이는 동물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밖으로는 호랑이를 표현하는 무늬가 있다. 곰이 동굴 속에서 마늘을 먹고 생활하는 모습은 아닐까? 이들 그림을 보면 단군신화의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의 민족정신의 뿌리로서 단군신화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신화다. 홍익인간은 환인이 환웅을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면서 제시한 지침이었다고 전한다. 


『제왕운기』에서는 환인이 환웅에게 묻기를 ‘삼위 태백으로 내려가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그 의지를 물었고, 환웅이 이를 약속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신화와 그 사상을 공유하며 하나의 문화를 유지해 왔다. 곰을 모시는 종족과 호랑이를 모시는 종족과 같이, 한국이 지리적으로 두 세력 사이에서 그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지켜낸 것도 홍익의 정신을 같은 뿌리로 두고 있다는 의식이 있어 가능했다. 결국, 한국이 수많은 외부의 침략과 지배에서 지금까지 하나의 민족을 이룰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과 같이 단일 민족성을 유지하며 국가를 운영하는 나라는 거의 드물다. 세계 문명의 역사를 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세계 모든 문화권은 서로 섞이고 흡수하기를 반복해왔다. 그 사이에서 조화롭게 어울리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민족 간의 분쟁이나 종교 간의 분쟁 등은 결국 하나로 융화되지 못한 문화의 대결이다. 문화는 철학을 기반으로 한다. 철학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상이다.


이런 철학과 사상의 차이를 나누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신과 인간의 문제다. 어쩌면 세계 문명의 역사를 신(God) 중심의 사고와 인간 중심의 사고 사이의 갈등과 극복의 역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갈등은 수많은 전쟁과 비극을 초래했다. 일종의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 사이의 극한 대립이다. 그 대림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이 바로 한국에 있다. 그들의 극한 대립 속에서도 홍익 사상은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깨울 한국의 정신


나는 한국에서 그런 사상을 사이비 종교나 미신 정도로 치부하는 일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는 나무가 이루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의 가지의 휘어짐과 옹이 하나로 숲을 탓하는 것과 같다. 어쩌면 미래의 하나 된 세계를 지탱할 정신이 될 수도 있는 정신을 손에서 놓으려고만 한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가 그곳에 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무색해진다. 일부  ‘홍익 정신’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까지 너무도 멀게만 느껴진다.


자국 문화에 자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홍익 정신’은 5천 년이나 지난 고루한 사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밖에서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21세기 태평양 시대를 주도할 세계 최고의 사상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 보물을 잃어가는 한국인들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자신들의 정신을 잃으면 미래도 잃게 된다. 오늘날 미국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정신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미국의 건국 정신은 자유와 평등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은 전쟁과 억압, 배척과 몰인정으로 가득하다. 북한과 중국, 아랍권 국가에 대해 적과 친구의 관계를 오가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류의 생존이 경각에 달렸다는 과학적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도 기후변화 연구를 중단시켰다. 미국이 맺은 모든 군축 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하려 한다. 재앙은 이제 우리 턱 밑까지 다가와 있다. 우주 군사화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발족시킨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런데도 미국 대통령은 경제 번영을 이야기하며 자화자찬하기 바쁘다. 수많은 파산 직전의 사람들, 노숙자들, 사회적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못 본 체한다.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은 이 세상에 핵전쟁을 불러올 생각만으로 신이 나 있다. 그들은 그동안 시리아, 이란, 베네수엘라, 중국, 러시아와의 전쟁을 동시에 지지해왔다. 미래의 전망이 어두워질수록, 그들의 열정은 뜨거워진다.  

미국은 경제번영을 이야기하면서도 수많은 파산자들, 홈리스들, 사회적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시인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재림 (The Second Coming)>을 쓰며 트럼프와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했던 게 틀림없다. 

그들은 “피로 어두워진 파도”의 “빗장을 열어”, “선한 자는 모든 신념을 잃고 악한 자는 격정으로 가득한” 대혼란을 가져왔다. 


미국의 정신은 오늘날 왜곡된 자본주의로 대치된 듯하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었던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미국의 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론 자신 스스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제퍼슨 자신도 이 한 줄의 문구를 감당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 말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이 말은 바로 홍익인간의 정신이었다. 이 위대한 문구는 시간이 지나 남북전쟁을 통해 그 첫 단추를 끼우게 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1월19일에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던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행해졌다. 링컨은 전사자를 위한 국립묘지 봉헌식이 열린 게티즈버그에서 이 짧은 연설을 통해 미국의 건국이념과 전쟁의 타당성, 그리고 죽어간 병사들과 유족에 대한 위로를 간결하면서도 강력하게 표출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이 연설은 그 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최고 명연설 중 하나로 남아 인용되고 있다.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하는 링컨

아마 미국이 과거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바로 한국의 홍익인간의 정신을 새겨야 할 것이다. ‘홍익’의 정신은 제퍼슨 스스로 적어놓은 한 줄의 글과 ‘자유의 제국’을 건설하자는 미국의 이상을 대변할 수도 있다.

한국의 정신이 미국의 정신을 되살릴 수도 있다. 새로운 한류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1차 한류가 대중문화였다면, 2차 한류는 ‘홍익정신’과 같은 한국의 전통과 정신이라는 고급문화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의 마음에서부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홍익정신은 세계 모든 정신문화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할 만큼 뛰어난 정신이고 가치다. 


미국과 유럽의 정신적 토대가 되어 온 것이 기독교이고 중국은 공자 사상이 정신적 가치다. 일본의 경우 천황 중심의 신도이즘이 있다. 여기에 한국의 정신은 홍익이고 그 홍익은 민족적 가치의 출발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세계는 인류의 이상세계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꿈이 실현되는 나라 한국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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