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분만 날짜를 잡았다. 출산휴가 들어간 지 열흘 만에 병원으로 향했다. 출산휴가 들어가기 전까지 출산휴가에 이어 육아휴직을 쓸 수 있을지, 쓴다면 몇 개월 후 복직할지 회사와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터라, 아이를 낳기 전에 휴가일수가 차감되는 것이 아쉬웠기에 결정한 부분이다. 혹시라도 3개월만 함께 보내고 복직을 해야 했을 수도 있으니까.
회사에서는 일찍 복직해주었으면 한다(출산휴가만 쓰고 복직)는 의견이 있었다. 그의견에 대해 답변은 하지 못했다. 나와 남편은 아이를 낳고 육아한다는 것, 그리고 어린아이를 키우며 워킹맘으로 일을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건지, 출산을 한 엄마의 몸은 어떨지, 아이는 그즈음엔 어떤 상황일지 알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회사에서도 임신한 여직원이 내가 처음이었고, 3개월의 출산휴가도, 육아휴직도 처음 있는 일이니까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했다. 출산휴가 전에 동일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직원을 새로 뽑긴 했으나, 신입 직원이었고 나와 호흡을 약 2개월만 맞춘 채로 나의 모든 일을 그 친구에게 맡겨야 했으니 회사의 고민도 이해할 수 있었다. 회사와 나는 3개월이 지나는 시점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으니 여하튼 출산휴가 이후에 대해서도 고려했어야 했다.
출산 진진통 걸린 그래프 ㅎㅎ
출산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진진통은 3시간 정도 짧고 굵게 겪었고 출산 직전에 맞은 무통 빨로 최후의 출산 순간과 후처치는 정말 비교적 괜찮았다. 출산 무사히 잘하고 조리원에 가서도 잘 쉬고 잘 먹고 잘 지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이후, 그날부터 육아 전쟁 시작이다. 신생아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이지 혼돈의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아이를 낳았던 시기는 전례 없던 코로나19가 대유행하던 시기였고, 그 덕에 외출도 조심스럽고 누군가를 집에 들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연차를 쓰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준 친정엄마 덕분에 집에서도 2주 동안은 함께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엄마가 간 이후에는 남편이 출근한 그 시간에혼자서 아이를 케어하곤 했다.
출산 휴가 중 한 달, 그리고 두 번째 달이 지나니 다시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한다. 이 조그마한 아이를 두고 회사로 복직할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이는 통잠을 자지 않았고 주 양육자인 나는 매일 잠이 부족해 허덕이는 상태였다. 씻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일정치 않았다. 두 달이 지났는데 삶이 너무나 많이 변해서 아이를 낳기 전에 내가 한 일이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인지 아이를 출산한 나의 몸은 두 달 즈음 지나니 대부분 회복되었고 몸도 가벼웠다. 일찌감치 조리원에서 체중도 많이 감량한 터라 "두 달 정도면 산모 몸은 회복이 되긴 되는구나?"라는 생각도 잠깐 하기도 했다.
그렇다. 나의 몸은 일을 하든 아이를 보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어른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 눈 뜬 지 얼마 안 돼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하고 온몸으로 익히는 그런 시기였다. 엄마가 된 나도 아이와 교감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시기였고, 엄마로서도 성장해야 하는 시기였다. 물론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한 아이를 부부가 양육하기 위해 튼튼한 뿌리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로 여겨졌다. 남편과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왔고 연애도 3년이나 했으니 서로 잘 알 법도 한데 육아를 하니 또 다른 서로의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 하루하루 미션이 정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출산휴가 끝날 무렵 다시 한번 대표와 통화를 할 때는, 육아휴직의 뜻을 비췄고, 회사에서도 육아휴직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주셨다. 신입직원에게 인수인계하며 남겨둔 일을 진행했을텐데, 내게 연락 온 것이 없으니 큰 이슈 없이 잘 마무리된 것 같기도 했다. 추후의 프로젝트에서는 나의 보직이 필요한 일은 최소화하며 조율하시겠다 했으니 당분간은 공간디자인 업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듯 보였다. 출산휴가 전에는 걱정을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그래도 육아휴직이 보장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출산휴가+육아휴직 약 1년 정도를 휴직하겠다고 구두로 이야기를 나눈 뒤 한참 동안 회사와 연락할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