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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Apr 15. 2019

나를 미워할 사람은 내가 밥을 사도 미워한다.

2019.4.15.

너는 다른 사람 시선 같은 거 전혀 신경 안 쓸 것 같아.


최근에 정말 자주 듣는 이야기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의 뉘앙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너는 쿨해서 좋겠다’는 약간의 칭찬(?). 다른 하나는 ‘너만 잘났냐’는 약간의 비꼼.

기분이 좋아지거나 화가 날만도 한데 사실은 도통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냐면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나에 대한 평판에 더럽게 신경 많이 썼던 신경 과민 환자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강박의 시작은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륙지방인 충북 청주에서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그 때 만난 친구들은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 같은 아름다운 교제를 하는 교과서적인 아이들이었다.


그러다가 3학년 초에 갑자기 엄마아빠의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바닷가 아이들의 성질머리란 매섭기가 바닷바람 못지 않았다. 서울말(과 비슷한 충청도 사투리)을 쓰는 공부 잘 하는 애는 다행히 아이들의 호의어린 관심을 받았고 무사히 무리에 안착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평탄한 교우관계였다. 매년 내 생활기록부에는 ‘교우 관계 원만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하루하루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자기 주장 강한 부산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 하나에게라도 미움받지 않으려고 매순간  말과 행동을 검열했다.


별로 해가 되지 않을 아이라고 생각됐는지 이상하게도 친구들은 자기 비밀이야기를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했고 본의 아니게 학교 안의 권력다툼과 감정싸움, 삼각관계 등에 대해 빠싹하게(경상도 방언) 알게 됐다. 그러니 가운데 낀 내 입장을 지키기가 곤란스러워졌다. 더 많은 소식이 귀에 들어올 수록 나는 ‘나라도 모두와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에 휩싸였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이런 저런 백일장에 빠지지 않고 참가했는데, 학교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월요일 아침 조례 시간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올라간 내 등 뒤에서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가 크게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던 때였다. 내가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아무도 나를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같이 기뻐해 주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고 2 어느 날이었다. 주말에 집에서 공부를 하려고 학교에서 들고 온 문학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표지가 갈기갈기 난도질 돼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누구 짓일까. 누가 내 책을 이렇게 찢어놓을만큼 나를 미워할까. 어쩌다 실수로 한 걸까. 아니야 그러기엔 찢어진 부분이 너무 예리하고 반듯해. 누굴까. 나는 누구에게 이렇게까지 미움받게 됐을까.


끝없는 고민을 하던 중 문득 내 책상 서랍 안에 튀어나와 있던 못이 생각났다. 오래된 책상이라 상판 안쪽 부분에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은 못이 있어서 종종 손을 다치곤 했었다. 그러니까 그 표지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해서 일부러 찢은 게 아니라, 내가 억지로 책을 밀어넣다가 망가진 것이었다.

‘그래, 누구도 나를 미워하지 않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 후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봤을 때 나는 더 놀랐다. 내가 5시간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얼음처럼 굳어있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다리에 쥐가 났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에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보였다. 그럼에도 그 때는 책을 찢은 게 친구가 아니라 책상이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사랑받야 한다는 강박에 약간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생긴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면서 나는 10년을 같이 했던 친구 모두를 부산에 두고 와야 했다. 그러다 다시 만난 게 ‘과방’ 동기들이었다. 마치 중고등학교의 ‘반’ 과 비슷한 시스템이었다. 학부제로 입학해서 아직 과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이 많았고, 같이 들어야 할 필수 과목이 많았던 터라 09학번끼리 우르르 같은 수업을 듣고 우르르 과방으로 몰려갔다. 밥도 같이 먹고 공강 시간도 함께 보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허물이 없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해 주는 듯했다.


그 중 유독 나를 좋아해 주던 사람은 두 세 학번 높은 복학생 남자 선배였다. 내가 어떤 영화를 보러 갈 거라고 하면 자기도 그거 보고 싶었다며 따라갔고, 공강 시간에 그 비싼(당시에는 너무 비싸보였다) 투썸 디저트도 마구마구 사 줬다. 저녁을 같이 먹는 일도 몇 번 생겼고 그 때마다 걸어가도 될 거리를 굳이 택시를 태워 바래다줬다.

조금 부담스럽다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아니나다를까 선배가 고백을 해 왔다. 사람으로서는 싫지 않았던 선배여서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쿨하게 알겠다고 해놓고는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마음이 정해졌냐고 물어봐 왔다.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노 라고 대답했다. 선배는 시무룩하게 알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 때 부터였다. 나를 좋아해 주던 반 친구들의 태도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내가 다가가면 갑자기 웃음을 멈추는 일도 있었다. 쳐다보는 눈도 좀 달라졌다 싶었다.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건가 하고 있던 어느 주말, 싸이월드(!)에 접속해 있던 내게 한 동기가 대화를 걸어왔다.


“야, 너 정말 실망이다.”


?????

다짜고짜 화를 내며 동기는 내가 우리 반 남자 학우들에 대해 험담을 하고 다녔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인가 하며 아니라고 했지만 동기의 화는 삭을 줄을 몰랐다.


“너, 내 얘기 들을 건지 말건지 지금 확실히 해. 나중에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고맙게도 동기는 내 이야기를 듣겠다고 했다. 결국 헛소문의 근원지는 복학생 선배였다.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 것은 내가 노 라고 대답한 직후였다. 갑자기 ‘내가 아무리 미움받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해 봤자, 노력한 시간과 믿음과 그런 것들은 헛소문 하나에 사라질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학생 선배에게 뭐라고 항의를 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못나게도 숨은 것은 나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과방에 발길을 끊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내가 노력한 만큼 등가로 좋아해 주는 그런 일은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꽤나 어려웠던 것 같다. 가끔 몇몇 친구가 요새 왜 얼굴 보기가 힘드냐고 물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복학생 오빠도 과방 출몰을 관뒀고, 그 뒤로 가끔 과방에 들르긴 했다. 하지만 불편한 사람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불편하다.


다른 사람의 평판에 휘둘리던 내 인생을 제대로 바꾼 일이 있었다. 한 마디로 위화도회군이라고 할까. 언론사에 입사한 후 공포의 마와리를 돈지 한 달 쯤 되었나.

회사에 들어가서 업무보고서를 제출하고 라인(담당 구역)으로 복귀를 하자마자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라인 일진 선배가 퇴근하기 직전에 마지막 보고를 하며 아프다고 말했다. 선배는 너무나 매몰차게 “다른 애들 다 괜찮은데 왜 너만 아파? 돌아.” 라고 말했다. 이건 뭐지 싶었지만 일진 선배의 말은 곧 법이었고 눈 밖에 나고싶지 않았기일단 참고 돌았다.


속쓰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야간 당직을 서는 다른 선배에게 다시 한 번 보고했다. 아니 복사기로 찍어냈는지 그 선배도 “왜 너만 유난이야” 라고 말했다. 정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도 참고 돌았다.

다음날은 일요일. 새벽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거의 탈수 증상을 보이던 나는 일요일 아침, 당직 선배에게 보고를 하며 마지막 SOS를 쳤다. 정말! 놀랍게도! 세 번째 선배 역시!


“야, 왜 너만 아파. 뭐 했다고 아파. 성동경찰서로 가서 두 시간 후에 보고해.”


택시를 타고 기사님에게 “성동서로 가 주세요”라고 말을 했는데, 도저히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분명히 마와리를 돌기 전에 선배들은 “아프면 바로 말을 해야 조치를 취해줄 수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말했는데, 도대체 이 회사는 사람 중한지를 모르는 것일까. 한 사람만 그랬으면 그 사람이 이상하다고 하고 넘어가겠는데 어떻게 세 사람이 붕어빵처럼 똑같은 말을 하지? 이게 이 회사의 기자관인가? 인권 유린이 자행되는 현장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런 회사에는 도저히 못 다니겠다. 내가 아픈데 왜 성동서로 가야하지? 나 아니면 나를 챙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 아프다고 마음 써줄 사람은 나 밖에 없어. 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일단 내가 살고 봐야 해.


“기사님 잠시만요. 인천으로 가 주세요.”(이부망천)


일주일 정도 전화기를 끄고 잠적했다. 궁금해서 핸드폰을 켰더니 나를 급히 찾는 동기와 선배들의 메시지, 부재중 전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캡에게 전화를 했더니 잠시 회사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들어와서 얼굴 보고 그만두라고. 회사 관둘 생각을 하고 비장하게 앉아있는데 일진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사에 있던 선배 중 누군가가 ‘탕아가 돌아왔다’는 첩보를 넣은 게 분명했다.


“너 회사 왔다며?”

“네.”

“너가 뭘 잘했다고 회사에 들어와? 너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뭐? 잘못한 게 없어?????”


예전의 나 같으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손이 발이되도록 싹싹 빌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상대가 내 직속 상관인 라인 일진 선배인데 미움을 사면 큰일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20년 넘게 억지로 가둬둔 그 댐에 작은 균열을 한 번 냈더니 불량한 내가 와장창하고 쏟아져 나왔다.


어찌저찌 하여 회사에 다시 다니기로 했다. 한 번 난리를 쳤더니 온 회사에 소문이 나 있었다. 쟤 엉망진창 갈지마오(경상도 방언)라고.

그런데 오히려 그러고 나니 속 시원해졌다. 굳이 (있지도 않던) 이미지를 관리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어떤 지시가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말했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티를 냈다. 싫어하는 선배에게는 내가 당신을 싫어하노라고 말까지 했다. 그러다가 진짜 우러나올 때 다정한 말이나 예의 바른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막 좋아해줬다.


사람들은 열 번 잘하고 한 번 잘못한 사람에 대해 엄격하게 비난하지만, 열 번 잘못하고 한 번 잘하면 “어머 쟤가 웬 일이야, 저런 좋은 면도 있네?” 하며 갑자기 후한 점수를 준다. 미움받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에는 누가 나를 미워하는지 찾아내느라 놓쳤었는데, 그걸 신경 안쓰니까 (소수지만) 나를 진짜 좋아해 줄 사람이 눈에 보였다.


물론 난리를 쳤다가 돌아온 탕아에 대해 대놓고 비꼬는 선배도 많다. 내가 왜 라인을 이탈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들어보려 노력도 안 하면서 그냥 재미로, 혹은 진지하게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굳이 다 설명하려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내가 뭐라고 변명을 해도 듣지 않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외려 내 라인 일진 선배는 1년이 지난 후에 진심으로 나에게 사과를 했다. 처음 수습을 받아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지 몰랐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 그 선배랑 인사는 하니?”라고 짓궂게 묻는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잘 알지만, 미안하게도 우리는 인사도 잘 하고 마주앉아서 차도 마시고 할 거 다 한다.

마지막 SOS를 무시하고 성동서로 가라는 지시를 내렸던 선배와도 묵은 감정을 풀었다. 결국 미워할 사람은 엮인 게 없는데도 나를 미워하고, 나를 안 미워할 사람은 나랑 직접 엮인 게 있는데도 나를 안 미워한다. 얻은 것은 그 깨달음과 ‘원래부터가 예의 없고 냉소적인 애’라는 아주 쓸모있는 평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20년 넘게 나를 옭죄어왔던 ‘미움 받지 말아야지’ 하는 강박은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거나 조금이라도 미워하는 낌새가 보이면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데 달라진 게 있다면 그 고민이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를 미워할 사람은 내가 아무리 잘 해 줘도 미워하게 돼 있어. (왜 밥인지는 모르겠으나) 엄청 비싼 밥을 사 줘도 미워하게 돼 있어.” 그에 대한 방증으로 나를 좋아할 사람은 내가 욕을 해도 좋아한다.


괜히 비싼 밥 사고 있지도 않은 오해를 풀려고 시간을 쏟았는데도, 그 모든 것은 그냥 나를 미워하기 위한 핑계일 뿐 그저 나라서 미워했다는 걸 알게 되면 참 허탈하다. 어제 끝낸 책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에서 작가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게 자연스럽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도 그렇다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책은 온통 자기 변명 같은 내용 투성이였지만 이 문장 하나는 건질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자연스럽고 이유 없이 좋아진 사람들한테만 에너지를 쏟고 싶다. 그러니 나를 미워하실 분은 그냥 처음부터 마음놓고 미워하세요. 피차 시간과 감정을 허비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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