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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Apr 15. 2019

사랑해

2019.4.1.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연인에게서 “I love you” 소리를 들으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감동하고 눈물까지 흘렸다. 왜들 저러나 했는데 서양 사람들은 ‘like’와 ‘love’를 칼같이 구분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적당히 사랑한다고 해 주면 되지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게 그럴싸하게 들렸고, 또 언젠가부터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사랑해” 한다거나 처음 입을 맞춘 후 갑자기 “사랑해” 하는 한국 드라마에 몰입하기가 힘들어졌다. 저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저러나? 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알았다고 벌써 사랑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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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당시 만났던 사람은 미국사람이었고, 나는 “I like you”가 “I love you”로 바뀌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그 말은 정말 마법 같아서 공황 상태에 빠져 허우적대던 지난 몇 년을 씻은듯이 지워줬다. 이렇게 빨리 자라는 감정이 있을까. 이게 진짜 사랑인가보다. 내가 한국에서 사랑인 줄 알고 목숨 걸었던 것은 다 한류 드라마 대본 같은 거였어. 그 어마어마한 말에 매료된 나는 앞 뒤 재지 않고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내가 주무하던 큰 시리즈 기사가 있어서 휴가를 가지 못할 뻔 했는데 사랑의 힘(?)으로 1면 기사를 몇 개나 미리 써 두고 결국 캘리포니아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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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실리콘밸리에 취직을 해서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 사람은 나더러 그냥 몸만 오라고, 여기서 같이 살자고 온갖 달콤한 말을 해댔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못 갈게 뭐지? 미국에 오면 돈은 자기가 벌 테니 나는 좋아하는 글이나 쓰고 그림이나 그리라고 하는데 못 할게 뭐지? 그 사람이 사는 동네는 심지어 바다 풍경까지 마음에 들었다. 악명 높은 유나이티드 항공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오는 12시간 중 6시간은 계속 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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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론은, 그렇게 뜸을 들이고 용기 내어 말하던 아이 러브 유 역시 별 것 아니었단 거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그 사람은 “나는 너를 사랑해. 하지만 전 여친도 아직 사랑해”라는 멍멍이 소리를 해댔다. 썩 꺼지라고 하니까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 다시 오겠다는 더 어이없는 소리를 하기에 그냥 곧 다가올 다음 휴가 기간을 맞춰서 방콕에서 만나자고 했다. 어느 날 밤에 비행기 표까지 끊어뒀다가 갑자기 이것도 역시 사랑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마어마한 수수료를 물어가며 항공권을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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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내뱉고 들은 사랑한다는 말 중에 진짜는 몇 개였을까. 나의 경우에는 상대를 일부러 속이려거나 기분이 좋아지라고 한 것은 아니었고,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대충 이런 감정이 사랑 아니겠나 하고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속아놓고도 1년 전쯤 또 다른 사람에게 사랑 운운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지질한데 그 때 난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겁이 나서 “Sometimes I feel like I love you”라고 말했다. 상대방은 노련하게 “I know what it feels like”이라고 답했다. 비겁한 내 고백과 현명한 그 답변이 만나 좋은 우정을 만들어냈다! (우정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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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노래와 글도 참 많고 사전에도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 왜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 특히 국어사전에 나온 뜻풀이를 보면 저렇게 간단한 것을 감히 사랑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싶다. 나는 지금까지 모두 진심을 다해 사랑해놓고 지나고 나니 억울해서 발을 빼는 건가? 아니면 아직도 사랑이 숭고하고 뭐 엄청 대단한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못 버리는 건가? 가장 최근에 표현했던 ‘사랑해’ 중에 일백프로 진심이었던 것은 방명록에 나 스스로 쓴 ‘♡♡♡(내이름) 사랑해’라는 6개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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