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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Apr 11. 2019

뒷모습

2019.4.11.


사람이 많은 길거리에서 저 멀리 앞서 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어! 내 친구다!”


하며 달려간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 같다. (호기롭게 뒷통수를 쳤다가 다른 사람이었을 때 서로 민망해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지인들의 뒷모습 사진을 찍어야 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 사람만이 풍기는 분위기와 인상이 분명히 있다는 것.


ㅊㄱㅎ. 특유의 헤어스타일과 귀와 종아리.


사람을 판별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정확한 기준은 단연 눈코입의 생김새다. 출입국 심사대에 앉은 사람이 긴장한 내 얼굴과 여권 사진을 수도 없이 번갈아보며 확인하는 것만 봐도 앞모습이 얼마나 중요하고 직관적인 기준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내 사람들을 유심히 보고 있자니 그들이 나를 마주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나는 충분히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때로는 한 쪽만 유달리 닳은 구두 뒷굽이라든지 비뚤어진 어깨 같은 흔하지 않은 특징 덕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특유의 느낌 같은 것이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만들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작은 특징들이 한 데 모여 그 사람이라는 유일한 존재를 만들어낸 것 같다고 할까.


ㅊㅁㅎ. 이건 정말 누가 봐도 ㅊㅁㅎ.


뒷모습 사진을 찍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앞모습 찍히기를 꺼려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람들이 너무 예쁘고 소중한데, 그래서 사진으로라도 남겨두고 싶은데 다들 그걸 싫어했다. 정 그러면 뒤로 돌아보라고 하자 대부분이 거리낌없이 카메라 앞에 (뒤돌아) 섰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면 오히려 찍힌 쪽에서 반응이 좋았다. 한 번도 온전하게 본 적 없는 본인의 뒷모습을 확대도 했다가 멀리서도 봤다가 하며 굉장히 즐거워했다. 특히 제 3의 인물이 그 뒷모습 사진을 보고 “어, 이거 누구 아니야?” 하고 단번에 알아보는 것은 사진 속 주인공에게도 나에게도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ㅇㄴㄹ. 서울대입구역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사진을 찍으면서 또 재밌었던 것은, 모든 사진을 즉흥적으로 찍었음에도 사람과 배경이 놀라우리만큼 어울렸다는 점이다. 그 때 거기서 그 사람을 마주친 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정해져 있었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과 그 장소, 그 때가 한꺼번에 밀물처럼 훅 하고 밀려 들어오는 느낌이 좋았다.


홍대 앞에서 ㅊㅈㅎ.


뒷모습 사진을 찍었던 그 때 나는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대학생이었다. 곧 이 사람들과 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건지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을 찍자고 졸라댔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의 뒷모습 사진을 찍겠다고 호기롭게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도 만들었다.


#뒷모습도_말을_한다.

거창한 시작이 무색하게 지금까지의 게시물은 16개에 불과하다. 그 마저도 하나는 다른 사람이 같은 해시태그로 올린 사진이다.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은 2015년 9월 21일 회사 동기 ㅊㄱㅎ의 뒷모습이다. 우리 기수가 수습을 막 뗐을 때 찍은 사진이다. ㅊㄱㅎ는 가장 먼저 퇴사했다. 매일 퇴사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선뜻 실행하지 못하는 나는 지금, 말 그대로 ㅊㄱㅎ의 용감한 뒷모습만 바라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꼴이 됐다.


지금은 뒷모습 시리즈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도 꽤 어려울 것 같다. 나의 소소한 기쁨을 위해 자신의 뒷모습을 흔쾌히 보여 줄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게 큰 이유다. 만원 지하철 안이나 광화문 한복판에서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뒷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도, 정작 아는 사람에게 내 뒷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왠지 꺼려지지 않나. 가방을 한 쪽으로만 메느라 틀어진 체형과 곧지 않은 걸음걸이 같이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저 사람의 시선에 맡기는 것이니 말이다. 지금은 서로 잘 꾸민 앞모습만 보여주려는 사람들밖에 안 남았다. 나도 그렇고.


사진을 찍겠다고 뒤로 돌아보라고 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서 줬던 사람들이 새삼 고맙다. 그리고 그 때 내가 그들을 많이 좋아했구나 싶다. 뒷모습 사진인데도 그 때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뒷모습이라는 게 참, 이래저래 신기하다.


#뒷모습도_말을_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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