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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May 08. 2019

나는 행복합니다

2019.5.8.

나는 인위적인 우울감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일부러 우울하고 기분이 쳐지는 단조 음악을 틀어놓고 표정 없는 얼굴로 슬픈 생각들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타고 나기를 정말 별 것 아닌 것에 행복해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다. 그렇게 우울한 척 시크한 척 세상 슬픔 나 혼자 다 겪은 척 해도 결국엔 남이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에 “아 행복해” 하고 입 밖으로 소리낼 정도로 기뻐한다. 별안간 행복을 고백하는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은 아무래도 내가 가장 무방비상태일 때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다. 그래서 엄마는 자주 “아이고 좋겠다 그렇게 별 거 아닌 일에 쉽게 행복해서” 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마다 나는 자랑스럽게 “응!” 하고 대답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꾸준히 유행이다. 내가 요즘 굉장히 좋아하는 여행가이자 작가이자 모델인 제제 씨(www.instagram.com/jejebabyxx/)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행복을 어려워해서인지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오랫동안 유행하고 있다’ 고 했다.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낙을 못 찾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낙이 뭔가요” 물어보고 다닐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보니 그 낙, 그러니까 행복 비스무리한 것을 자꾸 거대하고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에 맞추다보니 막연히 없다고 생각하고 또 찾기 어려웠던 거 아닐까 싶다. 물론 삶이 내내 행복한 기분으로만 가득찰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당장에 부당하고 짜증나는 일이 생기면 ‘아 내 삶은 왜 이모양일까’ 하는 푸념을 하게 될 것을 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하기를 신은 인간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고난만을 준다고했다. 그러니까 그 거대한 절망을 상쇄시킬 만큼의 자잘자잘한 행복들은 늘 주어진다. 적어도 제로썸은 만들 정도의 행복이.


일단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고양이. 하루키는 겨울 밤에 고양이가 품에 파고드는 게 좋다고 했다. 물론 곁을 잘 주지 않는 고양이가 내 품에 안기고 싶어 하면 정말 행복하다. 그렇지만 내가 더 행복한 순간은 까칠한 고양이가 나를 참아줄 때다. 보드라운 배나 말랑한 발바닥을 만졌는데 굉장히 싫어하는 표시를 내면서도 잠깐이나마 참아줄 때 좋다. (좀 변태같나?) 혹은 실수로 발을 살짝 밟았는데 호들갑을 떨며 “미안해!!!” 하면 어이가 없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갈 길을 갈 때가 좋다. 그 고양이에게 나라는 존재가 해롭지 않고 이 정도 쯤은 용서해 줄 수 있을만큼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예가 아닐까 싶다.


좋아하는 운동화를 신고 길거리를 씩씩하게 걸어갈 때의 기분이 행복하다. 한 때는 하이힐이 아니면 신지 않았고 딱딱한 부츠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날이 갈수록 발이 편안한 운동화가 더 사랑스럽다. 운동화를 신으면 걸음이 굉장히 빠르고 자신만만해지는데 그 리듬에 맞춰 양 옆 머리카락이 귀 뒤로 날릴 때 상쾌하다. 운동화를 신는 게 얼마나 행복하냐면, 사람이 가득찬 지하철에서 자리가 없어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가더라도 몸이 가뿐할 정도다.


운동화와 더불어 천 소재의 가방에 좋아하는 참(charm)을 달 때도 행복하다. 요즘엔 내가 색깔별로 사 둔 무인양품 백팩에 엄마가 공방에서 사다준 뜨개 소재의 참을 달고 다닌다. 운동화를 신고 씩씩하게 걸으면 참이 가방에 매달려 달랑달랑 거릴 것을 상상한다. 아 요즘은 그 가방 안에 꼭 에코백 하나를 접어 넣고 다니는데 예상치 못하게 짐이 늘어날 때 당당하게 꺼내어 짐을 담는다. "쇼핑백은 100원인데 구매하시겠어요?" 하고 점원이 물어볼 때 "아니요"라고 말하며 에코백을 꺼내는 순간도 행복하다. 조금 무겁더라도 매일매일 선글라스를 들고 다니는데 햇빛이 강렬한 날 가방 안에 선글라스가 들어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훨씬 좋아진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손으로 마음껏 비빌 때. 재채기를 하고도 화장이 번졌을까 눈 아래를 닦지 않아도 될 때.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넘길 때. 예전에는 머리가 한 올이라도 흐트러질까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우스꽝스러워보여도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느낌이다. 어쩌면 많이 내려놓은 이 느낌 때문에 그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스트레칭을 했는데 마침 뻐근하던 곳이 탁 하고 풀리면서 굉장히 시원해질 때. 전에는 발등에도 닿지 않던 손 끝이 발바닥까지 감싸쥘 수 있게 될 때. 워낙 가구 위치를 바꾸는 것도 좋아하는데 낑낑대며 가구 배치를 다시 해 두고 소파에 앉아 집을 바라보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행복하다.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 유명하고 잘 알려진 책 말고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냥 친구같이 느껴지는 보통 사람들의 일기 같은 에세이가 좋다. (오늘도 땡스북스에서 좋은 책을 하나 찾아냈다.)


핀터레스트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그 느낌대로 그림을 그리다가 어쩌다 그은 선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순간도 행복하다. 보기 좋은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을 발견했을 때. 요즘은 선우정아 씨의 2015년 노래 봄처녀 뮤직비디오를 출퇴근길에 꼭 한 번씩은 재생한다. 만원 지하철에서도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는 중이다. 셀카 말고 다른 사람이 찍어 준 사진 속에서 내가 정말 환하게 웃고 있을 때도 기쁘다.


당장 어제 밤에 느낀 행복은 2000여 장의 사진으로 가득차 있던 인스타그램을 정리했던 일이었다. 무려 100장으로 간추려냈다. 시크하고 어딘가 깊이 있는(우중충한) 도시여자인 척 인스타그램 피드를 꾸며(?)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리하며 보니 역시 나는 행복한 때 미친듯이 쓸데없는 사진을 올려뒀다. 엄마가 말하는 그 ‘별 거 아닌’ 것이 너무나 행복해서 남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행복의 순간들을 마구마구 피드에 올려왔다. 누군가는 ‘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들을 게시하지?’ 했을 것 같다. 수백 장의 사진을 정리하며 약간 미안함을 느꼈다. ㅎㅎ


이렇게 적고 보니 참 행복할 일이 많다.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인데도 이렇게 기쁘고 좋고 행복할 수 있다니.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만 적었는데 아마 발행을 눌러놓고 조금 뒤에 ‘아, 이 때도 행복한데. 이것도 행복한데.’ 하며 못 적은 게 더 많다고 아쉬워 할 게 뻔하다.(그러고보니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해서 작가가 되었고 ‘발행’ 버튼을 누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하다.) 그렇게 또 새로운 행복들이 모이면 다시 한 번 정리를 해야겠다. 부디 그 정리를 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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