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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May 06. 2019

연애를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019.5.6.

점심이 지난 애매한 오후에 메시지가 왔다. 뭐 하고 있냐고, 나오라고, 만나자고.

모처럼의 긴 연휴에 마음이 느긋해져서 대대적인 집 청소와 가구 재배치를 하고 있던 나는 메시지를 보고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즉흥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인천 우리 집에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출발해 서울 어딘가에서 만나려면 최소한 3시간은 걸리는 게 가장 현실적인 이유일 것이다. 내가 서울 안에 있을 때에는 번개 요청이 나쁘지 않다. 예를 들어 한창 업무 중인 오후 3시 쯤 연락이 와서 너희 회사 근처로 가게 됐는데 퇴근 후에 저녁을 먹자거나 하는 연락은 내가 굉장히 피곤하거나 하지 않은 이상 오케이다.


오늘도 집에서 이것 저것 일을 하고 있는 날더러 갑자기 나오라고 하는 게 싫었다.

그럼 그냥 안 돼. 지금 이미 많은 일을 벌여놨어. 못 나가. 미안. 하면 될텐데, 나오라고 한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오늘처럼 기분이 나빠지다가 결국 화가 난다.

조금 일찍 약속을 잡았으면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 보내지 않고 진작 만날 수 있었을텐데 이런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오늘 메시지를 보낸 사람과도 미리 약속을 잡을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은 어제 하루 종일 연락이 없다가 저녁에 갑자기 내일 일 해? 하고 물어봐왔다. 아니라고 대답은 했는데 그러고는 별 내용 없는 대화를 하다가 둘 다 잠들어버렸다. 그 때 그렇게 흐지부지하지 않고 나도 내일 일 안 해. 만날래? 그랬으면 산뜻한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편안하게 나갈 채비를 마쳤을 거고 이럴 시간에 이미 만나고 있었을 텐데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전에 연애했던 어떤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잦았다. 늘 바쁘다고 해놓고는 갑자기 연락을 해서 지금 나오라거나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처음엔 화만 났다. 미리 이야기하면 됐을 것을 왜 늘 임박해서 만나자고 해서 얼굴 볼 기회를 놓치게 하는 걸까.

그런데 바보같던 나는 안 된다 못 만난다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바쁘고 즉흥적인 그 사람의 시간에 내 일상을 맞추기 시작했다. 언제 그 사람이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언제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올지 모르니까, 어떻게든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으니까.


예상대로 내 생활은 망가졌다. 휴일이 와도 단 하루도 편안하지 않았다. 혹시나 만나자는 연락을 놓칠까봐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사라졌다. 갑자기 그 사람이 만나자고 해 오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나가야 하니까 아예 다른 일을 벌여놓지 않게 되었다.

내 시간은 오분대기조로 애인의 연락만 기다리는 날로 가득찼다. 그러다보니 친구도, 취미도, 스스로도 남지 않은 껍데기같은 나만 남았었다.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난 것도 그 때였다.


오늘도 자칫 그럴 뻔했다. 외출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이야기를 해 놓고도 나도 모르게 시계를 보며 지금 준비하고 나가면 몇 시쯤 될까 계산하고 있었다. 오늘은 나가지 않는 게 내일 출근을 생각해서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해서나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길들여졌던 예전 버릇이 나올 뻔 한 것이다. 그래도 지금 나가면 잠시라도 얼굴을 볼 수 있는데. 한국에 자주 오지도 않는 사람인데. 하는 바보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 나와 만나고 싶었으면 어제 저녁에 함께 이야기를 나눴어야 한다고. 그 쪽에서 알겠다 미안하다 답장이 왔다. 그러자 예전처럼 화가 나거나 슬프지 않았다. 내가 나를 먼저 생각한 게 너무나 잘 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의 즉흥적인 제안보다 나 스스로와의 약속이 선약이었으니까. 한국에 오는 날이 적은 그 사람이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지.


또 하나 그 때와 달랐던 것은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연애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와 연애 관계에 있지 않은 그 사람에게는 나를 늘 1순위로 둬야 할 의무가 없다는 생각이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 연락이 없던 어제는 다른 사람과 즐겁게 보냈을 수도 있고 혼자 느긋했을 수도 있는 거다. 오늘도 가만히 누워 있다가 갑자기 무료함을 느꼈고 그래서 내가 떠올랐을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나에게도 왜 어제부터 미리 데이트 스케줄을 함께 짜지 않았냐고 화를 낼 이유가 없다. 그래서 쓸데없이 화를 내어 양쪽의 감정을 망치지 않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누구와도 연애라는 관계로 엮여있지 않은 생활이 얼마나 나를 단단하고 평온하게 하는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 그래서 나도 안 바뀔 것을 안다. 연애라는 관계에 갇히면 또 상대방을 위해 내 생활을 버리고 별 것 아닌 일에도 쉽게 감정 소모를 하며 서로를 지치게 할 것임을 안다. 렇게 지워버리고 싶었던 지질하고 질척이는 내 모습이 다시 돌아오지 않게 해 준 비연애상태가 고맙기까지 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연애를 안 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나와 냉전 상태에 돌입했던 그 사람은 몇 시간 뒤에 다시 연락을 해 와서 방탈출을 하러 가자고 했다. 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자고 대답할 수가 있었다. 인기가 많아 예약이 어렵던 방탈출 테마를 예약해 두고 둘 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역시 연애를 안해서 가능한 거다. 연애라는 편협한 관계 안에 갇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연애의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그저 행복하기만 한 연애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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