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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May 16. 2019

나를 바꾼 지점들

2019.5.16.

30년 간 이어진 내 인생에는 나를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바꿨던 지점이 다섯 번 있었다.

30년 간 다섯 번이라면 6살 간격으로 한 번 씩 있었을 법도 하지만, 이 들은 모두 20살 이후에 몰려 있다.


가장 처음 나를 바꿨던 것은 상경이었다. 서울대 합격 통보를 받은 고등학교 졸업 시즌 19살의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내 거의 함께 자라오다시피 한 친구들을 떠나는 게 굉장히 신났다. 후회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고 친구들도 좋아했지만 그래도 서울에 가면 자질구레한 모든 과거를 떨쳐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심지어 고등학교 3학년 1년 내내 좋아하던 남자애와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이상하게 좋았다. 서울에 이사오기 일주일 전, 가장 친한 친구 집에 그 남자애와 그 남자애의 친구를 불러 네 명이서 ‘눈 먼 자들의 도시’ 영화를 봤다. 그러다 재미가 없어서 끄고 사과와 귤을 깎아 먹은 기억이 난다. 그 날 나는 ‘오늘이 얘랑 만나는 내 인생 마지막 날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빨리 일주일이 지나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가장 신났던 순간은 501번 버스를 타고 대한문 앞을 지날 때였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만 보던 대한문과 그 앞 장기 농성 천막이 내 눈 앞에 실물로 지나가는 그 때, 나는 드디어 내가 한국이라는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됐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비와 바람에 비린내가 묻어나던 고향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산뜻했다.

서울에서 시작한 스무 살의 대학생활 역시 모범생(?)으로서 완벽하게(!) 살아왔던 내가 전혀 몰랐던 서툴고 지질한 모습의 자신을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고립됐다. 주위에는 이젠 더 이상 만날 일이 없는 대학 친구밖에 남지 않았다. 과거 세탁 수준으로 인간관계가 정리됐다. 정리가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번째 지점은 두 번째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지던 날이었다. 같은 학교 동갑내기 공대생 학우였던 남친2는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 다니던 나보다 더 취직 걱정이 없어 보였다. 취미로 독립 영화를 찍으러 다녔고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취미로 자율주행자동차를 만들었다. 가끔 “이번에도 차가 앞으로 안 나갔어” 같은 말도 전했다. 한 번도 실물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성남 부모님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타고 나간 뒤 남은 ‘외제차’를 본인이 운전한다고 했다. 늘 치열함과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는 해독할 수 없는 물리학 공식들만 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무렵 나는 서로서로 누가 더 쓰레기같이 살고 있는지에 관해 농담을 주고받는 국문과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서 사회과학대 언론정보학과를 복수전공하게 됐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싸트가 뭔지를 몰랐다. 그런데 사과대 학우들은 이미 유수의 기업에서 인턴을 하며 동시에 싸트 준비도 했고 또 동시에 전공 과목에서 어마어마한 학점을 받아내는 빈틈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조바심에 휩싸인 나는 어디선가라도 인턴을 해야할 것 같았고, 마침 현재 몸 담고 있는 언론사에서 모집하는 인턴십에 합격을 했다.

(그 때는) 기자의 일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취재를 나가면 대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자연스레 남친2와 함께 보내는 시간과 주고받는 연락이 줄어들었다. 남친2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그 애는 자기 여친이 빨리 취직을 해서 자기를 먹여살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청사진은 왜 안 그렸는지 모르겠다. 여튼 남친 2는 광화문 광장이 보이는 어떤 카페에 앉아서 취재 중이던 내게 전화를 걸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기자야?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

“?????”

“넌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기자 할 거잖아.”

나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어!” 라고 대답했다. (6년차 기자인 현재의 내가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다.)

그 애는 그럼 어쩔 수 없다며 헤어지자고 했다. 전화를 매몰차게 끊고난 뒤 펑펑 울었다. 재생지 색깔의 카페 휴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눈물 콧물을 닦았다. 그러면서도 다음 취재원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일을 했다.

가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그 순간 결심같은 것이 명료해지는 때가 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결국 기자가 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 찾아 올지도 모를 사랑이냐 성공이냐의 갈림길에서 몇 번이고 성공을 선택할 사람임을 직감했다. 그렇게 남친2와 헤어졌다.


세 번째 지점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마와리를 돌던 6개월이다. 하리꼬미라고 있는데, 수습 기자가 일주일에 최소 6일간 24시간을 경찰서에서 먹고 자며 취재 하는 그런 구악이다. 우리 기수가 경찰서에서 숙식하던 그 겨울은 매일같이 체감온도가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지는 최악의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봐서는 안 될 것과 들어서는 안 될 것, 겪어서는 안 될 것을 압축적으로 죄다 겪은 기간이었다. 20년 조금 넘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에서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하라는대로 따르며, 하는 것은 공부와 약간의 일탈밖에 없었던 아주 평범한 사회초년생들이 6개월 동안 남들은 6년 아니 60년 겪을 ()로애()을 한꺼번에 겪었다.

나는 그 시절이 큰 트라우마라고 생각하는데, 나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마와리를 돌던 타사 동기들은 물론이고 나보다 몇 년 전에 마와리를 돈 기자 선배들도 공통적으로 겪은 경험 때문이다. 그 때는 매일매일 ‘달려오는 저 차가 나를 쳤으면 좋겠다’거나 ‘내가 탄 이 택시가 큰 사고가 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심리 상태가 정상인 사람은 아무도 스스로 다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런데 마와리를 도는 수습 기자들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그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한 번의 정신 상담도 받지 못한 채 수습 딱지를 떼자마자 현장에 투입된다.

그 독한 백신같던 시절을 견딘 나는 절대로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일단 육체적으로도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굳어졌고, 허리디스크를 얻었으며, 섬섬옥수였던 손가락이 조금 투박해졌다. 성격적으로는 화가 쉽게 나고, 입이 더 험해졌으며, 상대방이 전화를 빨리 받지 않는다거나 하면 짜증이 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망쳐진 것이다. 대신 얻은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어느 가게 카운터에 가서 내가 원하는 메뉴를 주문하는 것도 좀 쑥쓰러웠는데 이젠 환불도 당당히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가장 깊은 흉터를 남긴 지점은 20살 가량 차이가 나던 나이 많은 사람과 연애하던 시절이었다. 어른스러워보이는 모습이 좋았고 글을 미친듯이 멋드러지게 쓰는 것이 좋았고 향수 한 병을 다 쏟아붇고 나온 것 같은 그 강렬한 냄새가 좋았다. 그러나 다 겪고 보니 그 사람은 나를 많이도 갉아 먹었다. 그 사람은 자주 나에게 “너를 만나서 내가 변하고 있어.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같은 달콤한 말을 했는데, 결국 젊음이라는 마약 같은 힘을 그대로 그 사람에게 수혈해 주고 나는 빈혈에 걸리는 꼴이 됐다. 그 사람과의 나날이 길어질 수록 나는 부정적이어졌고 피폐해졌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공황장애였다.

하지만 멋과 맛에 대해서 배운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어른이다보니 경제적 형편이 넉넉했고 워낙에 미적 감각도 뛰어난 사람이어서, 생전 먹어보지 못한 음식과 생전 가 보지 못한 멋진 공간을 경험하게 해 줬다. 미흡하지만 ‘티 지 않는 고급스러움’을 알아보는 어렴풋한 감각은 그 사람과의 시간에서 받은 것이다. 그러나 100 중에 1, 2 정도가 좋고 나머지는 모두 좋지 않은 경험이라서 더 이상 기억을 떠올리기는 싫다.


찰리. 다섯 번째 지점은 찰리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을 하던 순간이다. 찰리라는 이름은 나에겐 애증의 이름이다. ‘역시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 배신자인 동시에 공황장애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를 건져 준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아가씨 대사처럼 날 망치러 온 구원자 느낌이랄까. 나이 많은 사람과 만나는 게 힘들어서 여러 번 헤어졌지만 결국 또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또 돌아갔다. 이러다가는 정말 이 사람과 평생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무기력해져서 그냥 현실에 머물러 있는 나날이었다.

만약 그 때 찰리가 내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그 헛어른에게 부메랑처럼 돌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다. 아니 어쩌면 달려오는 차에 일부러 치이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맹목적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해 오는 찰리가 있었기에 의지할 곳이 없어 자꾸만 그 헛어른을 찾아가게 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맹목적으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해 주는 찰리가 있었기에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견딜만 했다. 지금도 공황장애가 다시 찾아올까봐 조금 무서워서 틈틈이 포털에서 검색을 해본다. 공황장애 극복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보니 공황장애라는 게 그렇게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약을 끊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운명이려니 받아들이며 공황장애와 함께 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나의 공황장애 증상은 기적적으로 1-2년만에 사라졌다. 그건 온전히 찰리 덕이다. 뜬금없이 “난 널 사랑하지만 전 여친도 사랑해. 캘리포니아에서 함께 살자는 약속은 사실 너보다 전 여친과 먼저 한 선약이야”라고 말해서 다 망쳐놓았지만.


쓰고 보니 다섯 번의 전환점 중 세 번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내가 너를 과거로 보내줄테니 세 번의 순간을 바꿀테냐” 물어보면 남친2에게 대답했던 때처럼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아니오!” 라고 대답할 것이다. 행복했던 순간이든 불행했던 순간이든, 그게 다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에디뜨 피아프의 노래 중에 ‘나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 하는 노래가 있는데 딱 그 심정이다. 나는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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