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윈픽스의 빗치 May 17. 2019

평범한 사람이 나는 좋아요

2019.5.17.

평범하지 않은 분들이랑 친하시네요.


타사 동기이자 좋은 친구인 언니가 있다. 언니는 얼마 전에 업종을 바꾸는 큰 이직을 했는데 그 쪽 일을 하다가 나를 아는 제3자를 만났다. 언니는 내 이름과 또 다른 타사 동기의 이름을 대며 우리와 친하다고 했더랬다. 그러자 그가 저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본인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와 가까운 과거에 즉흥적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회사 근처에서 잠깐 혼자 살 때였는데 그날 따라 퇴근 후 아무도 없는 집에 빨리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런데 마침 근처 회사에 다니던 그에게서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오늘 퇴근 후에 뭐해? 잠깐 볼래?

평소 그를 젠틀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던 나는 옳다구나 하고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먼저 퇴근한 내가 그의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서 이십 분 정도 기다렸다. 헐레벌떡 달려온 그는 잘 지냈냐, 세련돼졌다 등의 이야기를 건네다가 바로 길 건너에 기가 막힌 맛집이 있다며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럴 예정까진 없었는데 어쩌다가 술도 마셨다.


조금 취한 그는 수 년간 사귄 여자친구에게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회사에서 사무를 봐 주는 직원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이기에 재미가 없지만 묵묵히 들어줬다.


당시 나는 술을 굉장히 잘 마셨고, 그는 나보다 술에 빨리 취했다. 안 그래도 화장실을 자주 가는 나는 술을 마시면 20~30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간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할 때마다 그는 함께 가자며 자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극적으로 함께 가자는 뜻을 피력하기에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어깨를 꾹 눌러 주저 앉혀야만 했다. 대체 왜 따라가려 하느냐고 물어보자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처음 화장실을 다녀온 뒤에 그에게 "화장실이 남녀공용이라 불편하고 신경쓰이네" 라고 말을 했기 때문일까 잠시 생각해봤다. 신경이 쓰인다는 나를 위해 화장실 문 앞에서 문지기 역할을 해 주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남녀공용 화장실에 같이 들어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술자리가 조금 껄끄러워진 나는 계속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그는 담배도 안 피우면서 자꾸만 따라 나왔다. 우리 자리에 놓인 가방과 지갑과 핸드폰은 어쩌고 둘 다 나와있냐고, 금방 들어갈테니 어서 들어가서 자리를 지키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 눈을 빤히 바라보고 싱글싱글 웃으며 담배 피우는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했다. 연기를 뿜고 숨을 쉬려고 담배를 입에서 뗄 때마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입을 맞추려고 했다. 나는 무슨 강아지 훈련 시키듯 "하지 마!" "안 돼!"를 연발했다. 그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키며 "헌신한 여자친구 헌신짝처럼 버리고 더 어린 새 여자한테 가고싶댔잖아. 그런데 지금 나한테도 수작질이야? 정신 차려 나쁜 놈아." 라고 소리쳤다. 대체 그 날 술이 얼마나 취했던 건지는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잘 모르지만 굉장히 코알라가 된 듯 휘청거리던 그는 풀이 죽은 채 식당 안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날 이후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피했다. 그런 사람이 날더러 평범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내가 살면서 겪어 본 여러 상황 중 이상하기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날의 주인공이었는데.



이 쯤에서 생기는 다음 궁금증은 그 '평범하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다. 맥락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술 먹고 화장실에 따라 가려고 했던 제3자가 이야기 한 '평범하지 않은 분들'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표현이었다는 게 확실하다.


얼마 전에 한 선배와 커피를 마시다가 나의 어떤 경험을 말했는데, 선배는 "그 점만 봐도 너보다는 내가 훨씬 보통이네. 나는 평범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그 말을 굉장히 자랑스럽고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은 채로 하기에 '평범한 게 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선배는 '정상이라는 말이지'라고 대답했다.


그 선배는 내가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몇 안 되는 회사 사람이지만, 선배가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그 평범하다는 형용사를 선배한테 붙여줄 수는 없었다. (후배가 잘못 처리한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주말에 혼자 묵묵히 새로 해 오는 회사 선배가 과연 보통 사람인가?) 선배 뿐만 아니라 우리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무실, 아니 우리 회사 안에 있는 사람 중 평범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 학교에서 만난 사람, 소개로 만난 사람, 취재하다 만난 사람, 심지어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도 모두 평범하지 않다. 모두들 세상 누구와도 같지 않은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겉으로는 무색무취해 보이는 사람도 관심을 갖고 몇 마디만 나눠보면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존재가 그 안에 들어있음에 놀란다. 너무나 많은 각양각색의 우주가 매일같이 충돌하며 새로운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비티에스도 말하지 않았나. 70억 개의 빛으로 빛나는 70억 개의 세상이 있다고.


여튼. 아래는 내가 선배에게 그려 보인 그림이다. 수학에는 젬병이라 엉망인 그래프지만 하고 싶었던 말은 평범(보통)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 선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서, 어떤 측면에선 보통(대체 보통은 또 뭔가)처럼 보이는 사람도 다른 기준으로는 극단적인 또라이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로는 서로에게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다.(단적인 예로, 찍먹파는 부먹파의 미식 기준을 죽었다 깨도 이해할 수 없다.)



'평범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이다. 모두가 뛰어나지 않을 지는 모르지만 색다른 점이 없다는 말은 수긍할 수가 없다. 온 몸을 문신으로 뒤덮는 게 좋다거나, 머리카락만 보면 흥분이 된다거나, 라면을 우유에 담가 먹는다거나, 고양이가 되고 싶어서 수백 번 성형수술을 했다거나, 목을 조르면 오르가즘을 빨리 느낀다거나, 新舊 두 여자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지만 눈 앞에 있는 또 다른 여자와 화장실을 함께 가고 싶다거나, 부처같이 너른 마음을 몸소 행동으로 옮기면서도 나는 평범하다고 즐거워하거나. 조금만 관심 갖고 들여다보면 세상은 이런 색다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아티스트 이랑의 노래 중에 내가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제목은 평범한 사람이다. 잠시 가사를 적어보겠다.

평범한 사람이 나는 좋아요
평범한 커피점에서 만나요
평범한 옷과 신발을 신고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말아요
평범한 사람이 나는 좋아요
평범한 일상을 함께 보내요

멋있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평범한 사람은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문득 슬퍼질 때가 있는데요
평범한 사람의 일기장 속에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차 있어요
왜 누군가는 항상 주목을 받고
왜 내 얘기는 너에게도 들리지 않는지


이 노래가 좋아서 수천 번은 듣고 따라 불렀는데 부르면서도 늘 의문이었다.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일기장을 가득 채울만큼 깊은 고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평범한 사람일까.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결핍을 발견하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평범한 사람일까. 평범한 사람임을 자처하는 이 화자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평범한 커피점에서 만나는 것이 좋다' '너와 보내는 평범한 일상은 아주 좋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주아주아주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그냥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조금만 상대방이 깔롱을 부리면 홱 하고 등 돌려 버릴 것 같은 그런 예민하고 감각적으로 앞선 사람같다.


그러보니 4차원 병(일명 최강희병)이라는 게 잠시 홍역처럼 돌았었다. 최근에는 '아이유병' 이런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평범'하고 싶지 않다는 발악들이 정체불명의 병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걸 보면, 사실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 취급 받기 싫은 거다. 자신의 독특한 면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거다. 그러면서 괜히 모난 돌이 정 맞을까봐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거나, 나의 유일무이함을 한 번 더 어필하고 싶어서 "난 평범해"라고 던져놓고는 "너가 뭐가 평범해"라는 상대방의 답변을 은연 중에 바라는 거다. 비범한 아티스트 이랑 역시 둘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솔직히 말하면 제3자가 나를 '평범하지 않은 분'에 끼워줘서 기분이 썩 좋다. 이렇게 톡톡 튀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그냥 그런 사람' 취급 받지 않는 일은 굉장히 흥미롭다. 내 기준으로도 참 이상한 사람이었던 제3자는 내가 자신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을 하고싶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로 자기가 평범하고 보편적인 사고와 행동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척하)는 건지 헷갈려서 언니가 저 이야기를 전해줬을 때 많이 웃었다. 전자였다면 여러 뜻으로 고맙고, 후자였다면 참으로 의뭉스러운 사람이다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로보로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