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윈픽스의 빗치 Jun 18. 2019

나도 누군가에겐 썅년

2019.6.18.

1.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


내일은 티비엔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가 방영되는 날이다. 극의 주인공들은 30-40대 여성 직장인들이다. 나보다 훨씬 돈도 잘 벌고 직급도 높지만 어쨌든 함께 경제 활동 전선에 뛰어든 30대 이상(!)의 여성 동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게 좋다.


저번 주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38살의 배타미 본부장이 좌절하는 모습이 등장했다. 또각또각 기분 좋은 소리를 내던 하이힐에서 내려와 회사 어느 귀퉁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고민을 토로했다. 그는 잘 나가는 연예인 한민규의 과거 룸살롱 시절 동영상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것을 삭제하지 말고 그냥 둬야 한다고 결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검 1위가 ‘한민규 자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주저 앉은 배타미는 넓디 넓은 회사 건물 안에서도 귀신같이 그를 찾아낸 회사 대표 브라이언에게 이야기한다.


"서른 여덟 정도만 되면 완벽한 어른이 될 줄 알았어요.
모든 일에 정답을 알고 옳은 결정만 하는 어른이요.
그런데 서른 여덟이 되고 뭘 깨달은 줄 아세요?
결정이 옳았다 해도 결과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런 것만 깨닫고 있어요."

무슨 자신감인지 배타미의 예상보다 10년 가까이 빠르긴 하지만, 나에겐 30살이 그랬다. 무슨 일을 하든 침착하고 옳은 선택만을 하고 그 선택에 차분하게 책임도 질 줄 아는 진짜 어른이 돼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난 여전히 20대 초중반 언저리에서 배회중인 것 같고, 회사는 학교 같고, 난 언제라도 기분이 나쁘면 깽판을 칠 수 있을 거라는 착각만 하고 있다.


여기서 나를 더욱 감복하게 했던 것은 브라이언의 대답이었다.


"마흔 여덟 정도 되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요? 아, 이거 스포일런데.
옳은 건 뭐고 틀린 건 뭘까?

나한테 옳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 것일까.

나한테 틀리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틀리는 걸까.

내가 옳은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해도 한 가지는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



2. 응 그래 알았어


얼마 전에 나는 ㄱ에게 크게 실망했다. 앞으로 ㄱ과 나 사이에 어떤 긍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고 해도 전처럼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알고 배려할 줄도 아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ㄱ이, 본인이 곤란해지자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 이름을 끌어들였다.


두루뭉술하게 기록해 보겠다. ㄱ은 원래 본인의 일이 아니던 업무를 맡아서 하게 됐다. ㄱ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ㄱ이 그 일을 하기 싫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누가 어떻게 시작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ㄱ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내가 혹시나 실수로라도 그런 말을 했나 싶어 ‘ㅅ(나)’과의 카카오톡 대화를 다시 한 번 살펴봤다. 그런데 역시나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나는 갑자기, ㄱ이 하지도 않은 말을 남들에게 거짓말로 떠벌리고 다닌 이상한 사람이 됐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갑자기 내 이름을 왜 말하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ㄱ은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100% 확신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ㄱ에게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한 적도 없다. 더구나 당신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제3자에게 옮기며 왈가왈부 한 적도 없다.”


ㄱ은 대답했다.


“말 해 줘서 고맙다. 응, 그래. 알았어.”


미안하다가 아니라 말 해 줘서 고맙다고? ㄱ이 나에게 미안해야 할 부분은 간단히 봐도 세 가지는 된다.


1. (설령 내가 헛소문을 퍼뜨렸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굳이 제3자의 이름을 거론한 것. 나라면 그냥 “다른 사람과 한 대화를 봤는데 나는 아니 그랬다”라고 했을 것 같다.

2. 공개적으로 이름을 꺼내기 전에 그 당사자에게 사실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것.

3. 타인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오해했던 것.



타인과 부대끼면서 지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나와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어쩌면 그 간단한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이번에도 또 멍청하게 다른 사람에게 기대를 건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



3. 나는 어떤 점에서 썅년일까요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함께 하는 시간이 오래되니 이렇게 크게 실망을 하게 된다. 내가 주위 사람들의 단점을 하나 씩 찾아낼 때마다 나는 궁금해진다. 그들과는 다르게 원래도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닌 나는 분명히 썅년일텐데, 과연 어떤 면에서 썅년일까.


최근에 보고 들은 경험들을 종합해서 대략 예상해 볼 수 있겠다.


1. 불만이 많다.

2. 이 불만을 숨길 줄 모른다. 이야기를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3. 부정적이다. 조금이라도 결과가 불투명하면 늘 최악의 상황부터 가정하고 본다.

4. 고분고분하지 않다.

5. (내 생각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일을 하기 싫어한다.

6.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건 정말 억울하다. 지금까지 많은 상사들이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게 내 능력의 전부인데.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쇼잉을 못하는 걸까)


많기도 하다. 나는 저런 행동이 당연하고 인과관계가 아주 명확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 얼마나 답답한 인간상이겠는가.

브라이언의 말대로 나는 옳다고 생각했는데 남이 보면 천하의 개새끼가 따로 없을 것이다.


인간 관계와 사회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토로하고 나면 꼭 이렇게 후회가 몰려 온다. 그 후회에는 ‘나는 뭐 그렇게 좋은 사람인가’ 하는,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에서 똥 묻은 개가 된 느낌이 포함돼 있다. ㄱ에게 실망했다고 이렇게 열불 낼 군번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더 심한 존재일테니.


일단 서른 살에는 세상의 이치와 인간 관계의 통달을 이룩하기에 실패했다. 그럼 그 다음 10년인 마흔살에 기대를 걸어볼까 한다. 일단 서른 살에는 내가 썅년이고 똥 묻은 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에라도 큰 점수를 줘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길 물어보기 쉽게 생긴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