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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Jun 28. 2019

길 물어보기 쉽게 생긴 사람

2019.06.28.

 나는 길 물어보기 쉽게 생긴 사람이다. 아, 사실 나 스스로는 알 수가 없고 길 물어보기 쉽게 생긴 사람인가보다 추측할 뿐이다.

 길 물음 당하기의 역사는 아무 것도 모르던 유딩 초딩 때부터 시작됐고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거치며 길을 묻는 사람의 수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나한테 무슨 자석이 달린 것도 아닌데 길을 헤매는 사람들은 어디서든 귀신같이 나를 찾아냈다.

 나는 어떤 공간에 있어도 그 곳에 오래 살았던 것 같은 토박이 느낌을 내는 사람인가보다. 누가 봐도 이 곳 지리를 잘 알 것 같은, 구석구석 골목길까지 훤히 꿰뚫고 있을 것 같은, 동네 사람처럼 생긴 그런 사람. 길 물음 당하기는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더웠던 어느 여름에 일본 교토에 있었다. 지하철이 없어서 조금 먼 거리는 택시나 버스를 타야 했는데, 궁궐 담벼락을 낀 이면도로에는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다. 터벅터벅 걷다보니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 의심될 만큼 낡은 버스 정류장 표지판이 나타났다. 언제 무슨 버스가 올지, 아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담벼락이 만드는 길고 가느다란 그늘에 비집고 들어가 서 있는데 저 멀리서 어떤 아저씨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저 아저씨에게 여기에 버스가 서는지 물어보면 되겠다 싶었다. 다가온 아저씨는 아주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빠른 일본말로 "###를 가려고 하는데 @@@번 버스를 타면 되느냐, @@@번 버스는 이 정류장에 서냐, @#$%@#$%" 하며 질문 세례를 펴부었다. 선수를 뺏겼다.


  "죄송합니다. 저도 몰라요.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한국 사람이라고 했는데도 아저씨는 굴하지 않고 자꾸만 버스의 행선지와 어떤 목적지로 가는 방법을 물어봤다. 갈수록 말이 빨라지고 어려워져서 멀뚱히 미소만 짓고 있었더니, 아저씨는 "감사합니다. 실례했습니다" 하고 걸어왔던 그 방향으로 쭉 다시 걸어갔다.


 또 다른 날은 양산을 쓰고 교토역 앞 버스환승센터를 지나는데, 30~40대로 보이는 동양 여성 두 명과 눈이 마주쳤다. '저들이 길을 물어보겠구나' 하는 느낌이 와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뒀더니 아니나 다를까였다.

 그들은 서툰 일본어로 어떤 관광 명소의 이름을 말했다. 나도 최선을 다해 일본어로 대답을 해 줬다. 그러자 그들은 땡큐 하더니 갑자기 또 어떤 버스의 환승 노선에 대해 물어봤다. 그것까지는 알 수 없어서 그제야 죄송합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하고 커밍아웃을 했다. 그들은 아, 저희도 홍콩에서 왔어요! 이 곳 분인 줄 알았어요! 하고는 다시 땡큐 하고 떠났다.


 길 물음 당하기의 유일한 좋은 점은, 길을 헤매다 던전에 홀로 떨어진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보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마음을 다잡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 요즘 길 물어보기 쉽게 생긴 사람은 뿌듯함보다 화를 더 자주 느낀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고맙습니다 소리에 이렇게 인색해 진 것일까.


 며칠 전에는 강남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9호선 급행열차를 탔다. 온 열차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지인과 통화를 하던 할주머니(아주머니에서 할머니로 넘어가는 단계처럼 보였다)가 김포공항 역에서 나와 같이 내렸다. 김포공항 역은 언제나 그렇듯 공항철도로 갈아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할주머니는 줄 지어 서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 중에 굳이 나를 골라 목적지를 말하며 길을 물어왔다. 9호선 안에서 너무 시끄러워서 몇 번 눈을 흘겼었는데, 이놈의 '프로 길 물음 당하기러'는 본능에 끌리듯 친절한 얼굴로 태세를 전환해 길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길인데 지하철 노선도까지 꺼내 보여주면서.

 할주머니는 내가 아무리 옳은 길을 가르쳐줘도 자꾸만 고집을 부리며 아닌데, 아닌데, 인천 1호선을 타랬는데, 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지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더니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있어봐, 옆에 아가씨 바꿔줘 볼게" 했다. 땀이 축축하게 묻은 액정에 볼을 대고 통화를 하는데 전화기 너머에 있는 그 지인이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나도 똑같이 공항철도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통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려준 길은 맞았고, 할주머니는 한 마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전화기를 돌려받았다. 나는 조용히 계양역에 내렸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하는 중에 웬 할아버지 할머니 무리가 내 셔츠 소매를 잡았다. 사람이 북적대는 공덕역에서 왜 하필 누가 봐도 바빠 보이는 나였을까. 여튼, 지하철 6호선을 타러 가는 길이 어디냐 묻기에, 또 예의를 지키느라 손가락 하나 말고 손바닥을 펴 공손히 방향을 가리키며 저 쪽으로 쭉 가시면 돼요. 했다. 역시나 할아버지 할머니 무리는 쿨내를 풍기며 갈 길을 가셨다.


 길 물어보기 쉽게 생긴 사람은 날이 갈수록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기가 싫어진다. 대충 방향만 가르쳐주고 자리를 뜨고 싶다. 아무도 나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는다면 기분 나쁜 상황도 만들어지지 않을 텐데. 하필 길 물어보기 쉽게 생긴 사람이라 희생양이 되고, 네이버 검색과 카카오 길 찾기까지 동원해 정성스레 길을 알려주면 쌩 하고 갈 길 가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자꾸만 상처를 받는다. 나도 바쁜데 굳이 걸음을 멈추고 내 데이터 들여서 검색까지 한단 말이오! 이러다 언젠가는 너무나 잘 아는 길인데도 "잘 몰라요" 하고 도망쳐버리는 매정한 날까지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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