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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Jul 29. 2019

유예 기간

2019.07.29.

전 애인이 2년 만에 메일을 보내왔다.


처음 온 것은 채 세 줄도 되지 않는 짧은 메일이었다. 간단한 안부를 묻는 내용이어서 부담 없이, 한 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덜컹거리는 공항철도 안에서 핸드폰 작은 자판을 두드리며 답장을 썼는데, 그 성가신 일도 나쁘지 않았다.


메일을 보낸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와 있었다. 사실은 금방 답장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말동안 왠지 메일함 열어보기가 싫었다. 그가 보내온 메일을 내가 읽고, 거기에 내가 답장을 했고, 그의 답장이 오기 전까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유예 기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었다.



결국 그에게서 온 답장을 오늘 아침 식사를 하면서야 열어봤다. 장문의 답장이었다. 다섯 줄 째 읽다가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메일을 꺼야만 했다. 그건 “너는 어떻게 지내?” 라는 나의 물음에 대한 단순하고 평범한 답변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고 우려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그동안 성취했던 대부분의 것을 잃었고, 삶의 방향도 송두리째 틀어져 버렸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탄 2년 전의 내가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다. 일주일을 그와 머무르는 동안 나는 행복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디즈니 동화들이 엉터리로 세뇌해 왔던 것처럼, 나는 내 존재가 그의 위험한 삶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계산해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두운 사람이었다. 그의 삶의 일부가 되는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인생에서 도망쳐 나온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안도하기까지 했다.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그의 곁에는 다행히 좋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덕에 살아남은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 내어 나에게 자기 과거를 속죄하듯 메일을 보냈다. 솔직히 짜증이 난다. 그와 나는 남이 된지 2년이나 지났고, 나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고, 잔잔하게 평범하던 내 일상을 망친 그 이야기가 작은 돌멩이도 아니고 운석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말한 2년간의 이야기는 부모님도 모르고 계시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읽은 메일에는 처음엔 발견하지 못했던 사진들도 첨부돼 있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미국 범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런 비현실적인 사진들이었다. 이런 사진은 대체 왜, 누가 찍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엔 미간을 찌푸리고 봤는데, 자꾸 보니 그냥 웃음이 나왔다. 자기 옛날 사진을 잔뜩 보내놓고 혼자만 신나서 제 인생을 설명하던 버릇은 여전했다. 

내 친한 친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너도 너다”라는 말인데, 귀에 익어서 언젠간 나도 한 번 써 봐야지 했지만 쓸 기회가 없었다. 이제야 적절한 용례를 찾은 것 같다. 그런 사진들을 아무런 걸러냄 없이 있는 그대로 보낸 것도,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자꾸만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참 그도 대책 없이 그다.

키스 한 번이면 개구리나 야수가 백마 탄 왕자가 되는 그런 디즈니 동화는 없다. 내가 2년 전부터 그의 곁에 쭉 머물러왔어도 그는 이 메일에 담긴 모든 충격적인 일들을 그냥 그대로 해왔을 것을 안다.



그가 잃어버린 것 중에는 한국으로 오는 공식적이고 미래가 보장된 루트도 있었다. 그의 인생을 바꿔버린 그 불의의 일은 그가 한국으로 오기 한 달 전에 일어났다. 그가 첨부한 사진 중에는 한국의 어느 기관에서 발급한 합격증도 들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나를 다시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면, 나는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걸고 온 힘을 다해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그를 받아줄 수 있었을까. 지금 그가 애틋한 것은 그가 내 곁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나에게 돌아오는 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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