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나와 비슷한 듯, 나보다 더 외향적이고, 동시에 더 이성적인 친구였다. 흥미롭게도 그 친구 역시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고, 세상의 이치를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종종 신앙인들의 논리를 가볍게 비틀며 농담처럼 놀렸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선’ 앞에서 멈추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서 묘한 공감을 느꼈다. 나 역시 오랫동안 개신교 신앙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교회를 3년이나 다닌 지금도 그 위화감은 여전하다. 그래서 올해가 끝나면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친구의 “개신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일이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개신교 ‘외부’에서의 비판과, 개신교 ‘내부’에서의 비판은 분명 다르다. 그 차이에서 오는 묘한 어색함이 있었다.
나는 개신교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교리와 예수의 사랑, 서로를 위하는 마음,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철학은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 아름답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개신교의 ‘사람들’이다.
말로는 “모태신앙보다 새신자가 더 낫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모태신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신앙의 서열을 나눈다. 전도라는 명목 아래 타인의 존엄을 짓밟고, 교회 안의 가족 사랑은 강조하면서도 종교로 인해 깨진 가정에는 눈을 감는다.
나는 종종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이성의 논리를 넘어서는 어떤 확신이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말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믿는다고 말할 것이다.
마치 환웅의 아내가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을 믿는 것처럼.
믿음이란 결국, 사실 여부보다도 그 믿음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인간으로 변화하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많은 개신교인들은 ‘믿음’을 자기 확신의 도구로만 사용한다.
그래서 타인의 의심을 모독이라 부르고, 질문을 불경이라 단정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광신도들은 어김없이 신성모독이라며 분노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섬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신들이 나를 정죄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젠가 교회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말했다.
“현재의 기독교는 죽어가고 있다. 한국 개신교는 개혁이 필요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 누구도 진정한 개혁의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무엇부터 바꿔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단 한 가지라도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답은 늘 막연하다 — “세속주의, 물질주의, 타락…”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개신교의 개혁은 훨씬 더 근본적이다.
그것은 ‘인간을 존중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배당의 규모보다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태도, 신앙의 순도보다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는 감각,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한 인간을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없다면, 그 어떤 개혁도, 그 어떤 믿음도 결국은 허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