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기대는 날이 온다면

by 삶 집착 번뇌

문득 내 주변의 신앙인들을 떠올려본다. 가장 가깝고 큰 존재인 우리 엄마, 불교를 믿는 사람들, 교회 사람들, 몇몇 고객들까지. 훑어보면 대부분은 기독교고, 그다음이 천주교와 불교인 듯하다.


불교는 신앙이 될 수도, 성찰이 될 수도 있다. 신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며, 세계관과 이단조차 허용한다.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의 사유는 한평생 읽어도 우주처럼 계속 팽창하는 느낌을 준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삶에 간절한 사람들이 많다. 어떤 친구는 업무가 과부하인데도 상사에게 말하기 어려워 교회에서 울분을 토한다. 그러다 나를 살짝 비꼬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는데, 그 표현이 나름 재미있어 다 같이 웃으며 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요즘 나는 간절한 게 없다. 자격증을 딸까 고민하면 결국 이유는 돈인데, 돈은 충분하다. 운동은 매일 해도 시간이 남고, 일을 해보려 해도 내가 직접 뛰면 오히려 적자가 난다. 직원들이 나보다 일을 더 잘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묘하게 즐겁다.


다만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은 있다. 적자가 나는 달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를 보며 ‘아, 지금은 정말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고 느낀다.


문득 생각한다. 과연 내가 신에게 기대는 날이 올까? 다원주의자인 나에게는 부처든 예수든 성모마리아든 큰 차이가 없지만, 굳이 그런 날이 온다면 아마도 가까운 사람이 아플 때일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죽을 만큼 아프다면 나는 어떤 기도를 하게 될까.


‘살려주세요’ 같은 기적을 바라는 스타일은 아닐 것 같다. 아마 **“고통을 최소한으로, 함께 보낼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아마 기도보다 먼저, 그 아픈 사람의 손을 잡고 사랑을 전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키려 한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기적을 구걸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바라며 함께 버티는 편이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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