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성직자

by 삶 집착 번뇌

요즘 문득 철학자와 성직자를 비교해보곤 한다. 조금 더 깊게 말하자면 철학과 신앙의 비교다.


철학은 삶의 지혜를 밝히려는 것이고, 신앙은 신의 말씀을 따르려는 것이다. 두 영역은 가까운 듯하면서도 먼 차이를 보인다. 삶의 지혜를 밝힌다는 것은 결국 삶을 윤택하게 만들려는 것이고, 신앙도 마찬가지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출발점은 정반대다. 철학은 “우리는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반면 신앙은 “하나님이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살아라 하셨다”라는 명령에서 출발한다. 철학은 ‘왜’라는 질문에서, 신앙은 ‘신’이라는 권위에서 시작한다.


쉽게 말해 철학은 땅에서 출발하고, 신앙은 하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결국 진리라는 목적지는 같다.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스로를 ‘다원주의적 무신론자’라 부른다. 신학자들은 아마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무신론자가 어떻게 다원주의자가 될 수 있지?” 하지만 다원주의란 반드시 종교에서만 쓰는 개념은 아니다. 다양한 길을 인정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다원주의다. 나는 신은 없다고 믿지만,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여러 갈래가 있으며, 그 진리란 결국 ‘나’가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 믿는다.


살다 보면 공허함은 끝없이 찾아온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어서 공허하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어서 공허하다. 돈과 시간이 모두 있어도 할 일이 없어 공허하다. 인간은 끝없는 모순 속에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봉사활동을 해보면 충만함이 채워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나보다 연약한 존재를 돌보면서 얻는 작은 감정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근원일 수 있다. 아마도 그때 뇌에서는 도파민이 아니라 세로토닌이 분비될 것이다.


철학과 신앙은 학문이라 부르기엔 애매하다. 그러나 또 다른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철학자는 직업이 아니고, 성직자는 직업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철학 외에 다른 직업을 가졌으며, 엄청난 부자는 아니어도 일반인들보다는 상류층에 속했다. 철학은 지능과 교육, 여가가 있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성직자는 교회 제도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지만, 개인적으로 자산을 축적하기는 쉽지 않았다.


양쪽 모두 같은 진리를 바라보지만,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철학자는 논리와 이성에 의지하며, 성직자는 신앙과 계시에 기대어 산다. 철학자는 성직자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한 방식으로 진리를 전해야 하고, 그것이 공감을 얻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지성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철학자는 부자는 아닐지라도 상대적 풍요 속에 있었던 셈이다.


얼마 전 신촌에서 신천지 교인들이 조용히 쓰레기를 줍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보다 앞서 교회에서는 신천지를 배척하는 강연이 열렸다. 신천지 교인들은 묵묵히 행동으로 선의를 보였고, 교회는 공개적으로 그들을 비난했다. 두 장면을 단편적으로만 비교했을 때, 오히려 내 마음은 신천지 쪽에 더 끌렸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은 포교 전략일 뿐이다.”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선악의 판정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와 성직자들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 나는 신천지의 교리도 잘 모르고, 교회의 본질도 완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교회가 늘 선하고, 이단은 늘 악하다’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바라보고 싶다.


결국 옳고 그름을 신에게 묻기보다, 나 자신에게 묻고 싶다. 철학자처럼, 인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