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신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누군가는 열 달란트를, 누군가는 반 달란트를 받았다는 식이다.
하지만 달란트는 과연 절대적인 양일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팔다리만 있어도 그것을 열 달란트로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기업 회장의 아들로 태어나고도 스스로를 반 달란트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 결국 달란트는 주어진 조건보다, 그 조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은 작은 성취에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축복을 받는다.
반대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누리고 있는 축복의 크기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그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다.
처음부터 부자로 태어난 사람은 추락했을 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고, 과감한 선택 앞에서 쉽게 주저한다. 반면 가난에서 출발해 부를 이룬 사람들은 추락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미 바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과감해질 수 있다. 선택의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에서 출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는 모습 역시 자주 보게 된다. 노동의 기쁨, 동료의 소중함, 친구의 애틋함, 때로는 가족의 온기까지도.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가 내게 “축복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축복의 이면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듯하기 때문이다. 빛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 가진 달란트가 몇 개인지를 헤아릴 수 있는 능력,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히 받아들이는 능력,
그리고 그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지, 어떻게 나눌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달란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능력만큼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은 정말 불공평한 존재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은 결과를 공평하게 나누지 않았을지 몰라도, 인식하고 선택할 자유만큼은 모두에게 남겨두었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만큼은, 신은 충분히 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