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사랑 존중 배려의 말이 아닌 그 말
요즘 들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사실 이들의 목적은 본래의 주장이 실현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과격한 언행과 충격적인 표현을 통해 사회에 문제를 드러내고, 공론화시키는 데 의의가 있다.
예전에 까칠남녀에 출연했던 은하선이라는 사람을 보며, 나는 그의 모든 발언이 과도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공포심이 들 정도였다. “세상에 정말 저런 여자가 있다면, 혹시 내가 잘못된 결혼을 하게 되면 어쩌지? 나는 절대 이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는 많이 미성숙했던 것 같다.
요즘은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한다. “아, 그런 여성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지금은 남녀 간의 기울기가 어느 정도 맞춰졌구나.” 현재 사회에서 남녀 인권은 크게 한쪽으로 쏠려 있지 않다고 본다. 여성들이 남성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남성들도 여성에게서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사회적 장치들이 이미 마련된 것 같다.
나 역시 미투 운동의 피해자였다. 어떤 여성이 나에게 고백을 했고, 나는 그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청소년기 애정 결핍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미국이었고, 우리를 지도하던 교수가 나에게 경고 차원에서 “Sexual Harassment(성추행)”이라는 단어를 썼다. 나중에 공부해보니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성추행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심한 경우도 많다고 느껴왔다. 나는 20살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운동을 해왔는데, 어릴 때부터 내 허벅지, 가슴, 엉덩이, 배는 종종 성적 대상화의 타깃이 되었다. 몇 번은 학교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 남자친구가 있는 여학생이 사귀자며 내 몸을 당연한 듯 만지던 일도 있었다. 장난처럼 보였지만 나에겐 불쾌했다.
최근 사회에 만연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는 남성들에게 꽤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누군가 “너 성인지 감수성이 없어, 좀 배워”라고 말하면, 그것은 “너 조금만 더하면 성희롱이야”라는 경고처럼 들린다. 여성 보호를 위한 귀족적 언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불쾌함을 표현하면, 오히려 “남자가 좀 참아”라는 말을 듣곤 한다.
더 큰 문제는 순수한 감정의 표현마저 위축된다는 점이다. 어떤 친구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용기 내어 “너 정말 예쁜 것 같아”라고 말했을 때, 당사자들은 그 진심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제3자가 “성인지 감수성 모르냐”라고 끼어든다면, 그것은 한 남녀의 사랑을 빼앗아가는 폭력적 발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성인지 감수성이란 말이 본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본다. 보호, 그 단어 자체는 참 좋은 의미다. 그러나 지금은 보호가 아니라 억압과 폭력이 되어버린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배려, 존중, 사랑’보다 ‘성인지 감수성’이 먼저 언급되는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