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지운 자리에 남은 가장 성경적인 삶
글을 쓰면 쓸수록 혼자가 편해지고, 자꾸만 괴로움을 찾아 나서게 된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배가 부를 때는 그저 잠잘 생각만 하거나 살이 찌진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놓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여유가 있는 사람이 남을 도울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괴로움이 내 안의 여유를 앗아가고, 그 사라진 여유가 배타성을 만들며, 역설적으로 그 배타성을 통해 타인을 더욱 깊게 고찰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종종 글을 쓴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 글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내 면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차마 글을 보여줄 수 없다. 내 글은 나의 더럽고 거친 부분만을 정제해 토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못 된다. 원치 않게 누군가와 잤던 일, 오래전 누군가와 깊은 사랑에 빠졌던 일, 개신교 내부에서 상처를 받고 복수심에 신학을 파고들었던 일, 그리고 대부분의 성직자가 타락해 있다는 사실들을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싶지는 않다.
종종 이성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종교 이야기가 나오고, 그때마다 나는 철학 에세이를 쓰는 작가라는 사실을 방패 삼아 변명하곤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라는 변명을 굳이 늘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크리스천이 아닌 내가 오히려 더 성경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간절하고 선하게 살고자 하지만 신을 절대자의 자리에 놓지는 않는 나는, 어쩌면 『도마복음』을 추종하는 크리스천일지도 모르겠다.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현실에서 발버둥 치기에는 훨씬 수월하다. 그래야 더 철저히 대비하고, 더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결코 지금의 개신교를 이런 모습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을 들고만 다닐 뿐 제대로 읽지도 않으면서 통독을 했다고 우기는 우매한 교인들, 그리고 체험적 신앙 운운하는 사이비 같은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