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우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친구가 많았고, 모두가 꺼리던 나를 늘 두둔해주고 챙겨줬다. 만약 그를 향한 나의 애정이 우상숭배라면, 나는 기꺼이 신성모독의 죄를 감수할 것이다.
그는 스물두 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가난한 상황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어느 날, 연인을 도저히 놓아줄 수 없다며 결혼을 결심했다. 정서적으로도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레 사회의 차가운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스물세 살부터 서른 살까지, 우리는 1~2년에 한 번 정도 겨우 만났다. 그마저도 나를 싫어하던 무리와 함께였다. 나는 늘 내가 먼저 연락하고 만나는 관계가 야속하다고 생각했지만, 뒤늦게야 알았다. 그가 가정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2년 전부터는 그가 먼저 연락하기 시작했다. “겜이나 한 판 하자”, “용인에 애들 데리고 내려간다”는 소박한 말들이었다. 어느 날, 그의 머리를 적나라하게 본 적이 있다. 염색을 잊은 건지 안 한 건지, 내 또래의 검은 머리와 달리 그의 머리는 눈에 띄게 희어 있었다. 서른 초반의 나이에 마흔처럼 보이는 흰머리. 그 순간, 나는 그의 삶을 실감했다.
“아버지의 무게란 저런 것이구나.”
그의 머리카락이 삶의 근육처럼 느껴졌다. 두 자녀를 책임지며 꾸역꾸역 버텨낸 세월이 거기에 있었다. 요즘 그는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나 이제 여유 있다~”라며 자랑하곤 한다. 나는 마음속 빚을 돈으로 갚아나가는 기분이다. 이자가 꽤 붙어, 완전히 갚기엔 아직 멀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이 가장 고독했을 때 손을 내민 건 신이 아니라 그 친구였다. 그 따뜻한 손길은 오히려 신의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학창시절에 기독교인 친구들의 무리와 잠깐잠깐 어울렸었다. 그중 리더 격인 복학생 친구가 있었는데, 처음엔 친했지만 어느 순간 멀어졌다. 고2 무렵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너를 멀리하는 게 너만의 잘못은 아니야. 하지만 너도 돌아봐야 해.”
그 말은 정론이었을지 몰라도, 어린 나에게는 심장을 꿰뚫는 대못이었다. 어쩌면 하나님 팔목에 박힌 쐐기보다 더 깊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로 ‘크리스천’이라는 단어는 내 안에서 복잡한 감정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마다 손을 내민 건 신앙의 이름이 아니라, 흰머리를 이고 살아온 친구였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속 ‘신의 형상’은 아직 분명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그의 뒷모습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