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믿음이 없는데 교회에 돈은 왜 내냐고.
사실 나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 내 형편에도, 교회에도 그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라는 개념 자체가 내게는 반감으로 다가온다. 내가 번 돈의 십분의 일을 왜 내야 하는가, 그런 생각 때문이다.
그래도 교회에 꾸준히 헌금을 한다. 남들이 십일조로 내는 만큼은 헌금으로 내고, 그 이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쓴다. 이유를 묻는다면 단순하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감사의 표현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헌신에 대한 보답을, 나는 인건비처럼 표현할 뿐이다.
현대 문명과 과학의 발전 속에서 교회의 진리는 절대적 진리에서 벗어났다. 이제 그것은 교회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상대적 진리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는 선이 없고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말은 교회 안에서는 울림이 있지만, 세상에서 했다가는 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많다. 신앙인도, 나 같은 무신론자도 각자의 방식으로 선을 향해 애쓰고 있다.
그렇다고 교회 사람들이 모두 나쁘다고 말할 순 없다. 오히려 교회를 다니며 선하게 살려는 이들의 비율은 일반인보다 높다. 문제는 그 착함이 쉽게 독선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한두 번 착한 일을 하고 “하나님, 저 잘했죠?”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독선이 된다. 그런 착함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배신감이 든 사람은 두세 배로 아프기 때문이다.
결국 상처를 주고받는 총량은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세상은 교회를 더 엄격히 본다. 거리엔 여전히 ‘불신지옥’, ‘예수천국’ 깃발이 나부끼고, 기독교에서 파생된 이단과 사이비들이 활개친다. 그럴수록 교회에 대한 이미지와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교회를 다니며 그들의 헌신을 느껴왔다.
그래서 그들의 노력과 봉사에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고 싶다.
그 마음이, 내가 여전히 교회에 돈을 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