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의 속도,추억의 농도

낭만은 느리게 가고 우리는 빠르게 간다

by 가비야

낭만은 느리게 가고, 우리는 빠르게 간다

'기차'라는 단어는 발음만으로도 묘하게 사람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비행기처럼 거창한 수속이 필요하지 않고, 버스보다는 어딘가 운치 있는 탈것.

나에게 기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내 인생의 페이지를 넘겨주는 타임머신 같았다.
어릴 적, 명절이면 부모님 손을 잡고 기차에 올랐다.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진 어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마냥 신이 났다.
큰집에 간다는 설렘보다, 기차를 탄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여행이었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만 봐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꼬마 시절이었다.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친구들과 바다를 보러 간다며 왁자지껄 기차에 탔고, 20대의 어느 날엔 남자친구와 손을 꼭 잡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때 우리의 발이 되어주었던 건 투박하고 느릿한 '무궁화호'였다.
그 시절 기차 안은 참 시끄럽고, 촌스럽고, 그래서 정겨웠다.
마주 보고 앉아 삶은 달걀 까먹으며 수다를 떨고, 지루해지면 끝말잇기나 게임을 했다.

무엇보다 가장 기다려지던 순간은 객실 통로 저 끝에서 "덜컹, 덜컹" 소리를 내며 다가오던 간식 카트였다. 그 카트가 오기를 얼마나 눈 빠지게 기다렸던가. 엄마를 졸라 사 먹던 바나나우유나 숯불구이 오징어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대전역 같은 정차역에서 주어지던 짧은 휴식 시간.
"지금부터 5분간 정차합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튀어 나가 플랫폼에서 파는 가락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마시듯 해치웠다. 뜨거운 국물에 입천장이 데여도 그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국수인 줄 알았다.


시간은 흘렀고, 기차의 풍경도 변했다.

이제 무궁화호는 박물관에나 가야 볼 법한 희귀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느긋한 낭만 대신, 'KTX'와 'SRT'라는 이름의 날렵한 녀석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세상이 빨라진 만큼, 우리를 실어 나르는 기차도 숨 가쁘게 진화했다.

지금 내가 타는 기차는 더 이상 낭만을 싣고 달리지 않는다.
노트북을 펴고 밀린 업무를 처리하거나, 지방 강의를 위해 시간을 쪼개어 이동하는 '비즈니스 공간'이 되었다.
마주 보고 앉아 수다를 떠는 대신 각자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가락국수의 뜨거운 김 대신, 조금은 답답한 히터바람과 함께 정적인 공기가 흐른다.

편해졌지만, 어딘가 조금 심심해졌다.
느리게 덜컹거리며 나누던 대화의 온도,
좁은 좌석에서 부대끼던 정겨움은
시속 300km의 속도에 밀려
차창 밖으로 날아가 버린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기차 타는 게 좋다.
업무 때문이든 친목 때문이든,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만큼은 일상에서 잠시 로그아웃되는 기분이 드니까.

차창 밖으로 빠르게 흐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 시간만큼은, 바쁜 세상 속에서 허락된 유일한 쉼표 같다.

비록 카트 아저씨도, 급하게 먹던 가락국수도 사라졌지만, 기차는 여전히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준다.
그것이 추억 속의 바다든, 현실의 일터든.


기차는 달리고, 내 삶도 덜컹이며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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