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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달 Oct 11. 2024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라

정답이 없는 마음놀이

마음놀이.


<마음놀이> 중고서점에서 발굴, 정가의 반을 주고 산 책이다. 저자 비수민은 11년간 군의관으로, 보건소 소장으로, 내과의로 일하다가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중국의 여성작가다. 34살, 글을 써보라는 아버지의 권유와 격려에 힘입어 일주일 만에 중편을 탈고했다고 한다. 딸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본인도 글을 쓰고 싶었다는)도 그렇고 자신의 재능을 살린 딸도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 어제 장안의 화제가 된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과 그의 아버지 한승원, 글을 쓰는 그녀의 동생 한강인이 떠오른다.

소장도서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의 힘.


그녀가 말한 마음놀이의 재료는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표지 아랫부분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걸 이번에 처음 발견) 그녀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을 하라는 대로 따라서 해보면 좋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나를 언어로 분명하게 말해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흰 종이 위에 글자를 써서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육십갑자가 다시 돌아온 내 삶'이 농축된 것 같다.


이런 식의 작업이 쉬운 건 아니다. 한번 따라 해 본다고 해서 갑자기 뭔가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음미하고 여러 번 해보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 문제는 잘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보는 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므로 가까운 '대상'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된다. 자기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고 많은 접촉면을 갖고 있는 가족, 친지, 절친의 눈으로 보는 게 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참고해야만' 하고 '참고할 만'하다. 가깝고 허물이 없는 사이는 감정덩어리라 상대의 진면목을 모를 수 있는 허점에도 불구하고. 살을 섞고 사는 배우자, 열 달을 품고 산통으로 낳은 자녀, 돌봄과 결핍을 동시에 물려준 부모, 부모사랑 쟁탈전에서 치열하게 다투며 성장한 형제자매의 눈으로 자신을 볼 필요가 있다.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게 '나'의 일부인데 있는 걸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있는 건 있는 거니까.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의 힘은 직면이다.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곱 가지 심리치유 프로젝트.


부제와 일곱 가지 프로젝트 제목만 적어본다. 참고로.


첫 번째 놀이 - 나의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는 무엇인가?

두 번째 놀이 - 나의 가장 중요한 타인은 누구인가?

세 번째 놀이 - 나는 어떤 사람인가?

네 번째 놀이 - 나를 지원하는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다섯 번째 놀이 - 부모 다시 고르기

여섯 번째 놀이 - 나의 묘비명을 쓰라

일곱 번째 놀이 - 나의 생명줄을 작성하라




나의 묘비명 쓰기.


책 속에 묘비명이 잔뜩 들어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묘비명과 우리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나의 묘비명 쓰기'라는 놀이를 할 수 있지만 이미 죽은 그들은 이런 놀이를 해보지 못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아직 남아있는 삶이 있고 보충하거나 고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놀이는 시작된다.


이 놀이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현재 상황에서 나를 위한 '현재형 묘비명'을 써보는 것. 다른 하나는 나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담는 '미래형 묘비명'이다. 둘 다 써보고 보관했다 나중에 꺼내보면 달라진 자신을 보게 된다는데 이걸 해보지 못했다. 책을 접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묘비명 쓰기는 쉽지 않다. 멋지게 잘 쓰고 싶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지난 삶이 한 문장으로 압축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빈 종이가 주는 막막함, 연필이 주는 묵직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왜 그런지는 모른 체 연필만 만지작 거리고 있다.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라.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라' 성 베네딕도 성인의 말은 삶을 회피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두고 자주 묵상하고 깊이 들여다보라는 말이겠지. 가톨릭 교리에서 죽음은 소멸,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 부활, 하느님과의 만남이니까.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는 삶이 있듯이 죽어보지 않았으니 알 길이 없지만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가까이에서 목격한 죽음들.

할머니,

오빠,

친구,

시아버지,

친정아버지.


상실은 삶에 대한 큰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묘비명을 쓰지는 못해도 묘비명에 포함될 내용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할머니처럼 며칠만 앓다가 가자.(원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몸살림을 잘해서) 오빠처럼 역할에 치여 자기 삶을 놓치진 말자. 친구처럼 남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죽자. 시아버지처럼 요양병원에서 죽지 않기를 기도하자.(이 또한 원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친정아버지처럼 남아있는 사람들과 화해하고 떠나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라도 '살던 대로 죽는다' 하니 마음먹어보는 거다. 되든 안 되는 마음을 다잡는 거다, 기왕이면 잘 살다가 잘 죽고 싶으니까.

엽서그림 By momdal



"아름다운 환상보다는 참혹한 진실이 더 나은 법이다."


책에서 가장 와닿는 문장이다. 결국 내가 마음공부 하는 이유도 내 앞의 진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아름답다고 해서 환상 속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 참혹하더라도 현실을 살아내야 하니까.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아는 만큼 살아지면 걱정이 없겠다.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지점을 발견할 때마다 으악, 화들짝 놀란다. 마음공부가 말짱 도루묵 같다.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밝아오면 또 하루를 살아가려고 힘껏 밀고 나가겠지. 뒷심이 릴 때도 있휘청거릴 때있겠지만 계속 가야지.


휘청거리면서도 앞으로 밀고 나간 흔적들이 누적될수록 단단해지려나. 새로운 문제로 새롭게 괴로워하더라도 괴로움이 사라질 때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고, 그늘이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던 시인처럼 나도 아름다움보다 참혹함을 사랑해야 하나, 환상보다 진실에 가까워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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