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심하게 훼손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궁궐의 전각을 허물고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만들어버렸으니. 1983년이 되어서야 '궁'이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외가에 살던 어린 시절 식구들하고 이곳으로 벚꽃놀이 나왔던 기억과 사진이 남아있다.
우직하고 듬직한 느티나무.
알아도 모르는 척, 모진 세상 험한 일 다 목격하고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무처럼 우직하고 듬직할 수는 없는 걸까, 나란 사람.
춘당지 가는 길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옆에 화려하게 단장한 벗에게 곁을 내주고 있다. 이러니 더 멋져 보인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춘당지 주변 풍경.
팔각 칠층석탑 가까이에 걸터앉아 춘당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은 아침 산책을 나온 사람들인가 보다. 조용히 바라보고 있음으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요함이 흐르는 아침 풍경이다.
소춘당지에서는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오리들이 화들짝 놀라 물 위로 튀어 오르고 대춘당지로 날아가고 난리법석 시끄러웠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웠다. 오리가 포즈를 취해주어 여러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춘당지는 원래 철새지만 텃새화된 원앙이 사는 곳으로 유명해서 원앙사진을 찍으려고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아침이라서 그런 건지 아직 그런 부류는 없다.
가슴 터질 듯 황홀한 관덕정 주변 단풍나무들.
여기가 가장 아름답다. 세월 따라 허리도 굵어지고 팔뚝도 두툼해진 단풍나무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누런 빛이 돌아도 주황빛이 돌아도 다 예쁘다. 비슷하지만 다른 빛으로 물들어 신비스럽고 영롱하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단풍 든 잎새들.
노랗게
빨갛게
새빨갛게
창경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백송白松
나무껍질이 얼룩얼룩한 흰 소나무다. 희귀하고 생장이 느려 옮겨심기 어렵다고 한다. 재동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백송, 조계사 백송, 통의동 백송. 내가 보고 아는 것은 이 정도인데 볼 때마다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한겨울에 눈을 맞고 서있는 백송은 얼마나 위풍당당하던가. 클라우드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사진을 다시 꺼내봐야겠다.
'늘 푸르고 당당하게 살라' 나무가 들려주는 말이다.
방하착放下着의 계절, 가을.
바람이 불자 단풍잎이 춤을 추다가 땅으로 내려앉는다. 바람이 아니어도 때가 되면 잎새는 땅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이렇게 바람이 단풍잎을 뜯어내 나무를 헐벗게 하는 모습을 보면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방하착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불교용어다. 가을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방하착의 계절이라고 해야겠다.
창경궁의 고즈넉함과 오래된 나무들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궁궐이다. 지난여름 독일인 여행객을 안내를 맡았던 친구의 말, 서울에서 제일 기억에 남고 좋았던 곳이 창경궁 춘당지였다고. 아름다운 걸 알아보는 눈은 국적불문 비슷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