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맘달 Dec 03. 2024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했었지

창경궁 춘당지

11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이라 창경궁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우리 첫눈 오는 날 여기서 만나자고 했었지. 아무리 춥더라도 펑펑 쏟아도 꽁꽁 싸매고 잠깐이라도 만나야 한다고. 창경궁에서.


펑펑.

눈이 퍼부었어.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게 하는, 발길을 가로막는 이었지. 그래도 순백의 궁궐이 보고 싶었어. 우리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면 안 되는 거였고 완전무장하면 되겠다 싶었어. 서울 시내인데 가다가 되돌아오더라도 출발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지.

순백의 꽃. 

빈가지에 눈이 내려앉아 꽃을 피웠어. 이 나이에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하고 만날 수 있어서 참 좋다.

뽀드득뽀드득.

부츠 신고 나오길 잘했어. 축축하고 질척해진 흙길만 아니라 눈길도 걸을 수 있으니, 뽀드득 소리가 듣기 좋아 계속 걷게 되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국민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던 노래인데 술술 나오는 걸 보면...... 어려 배운 건 몸에 박히나 봐.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여기는 고즈넉하고 고요해서 좋아. 우리 약속장소로는 손색이 없, 그치.

뚝뚝.

축축한 눈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뚝뚝 꺾였어. 습설, 무섭더라. 굵은 나뭇가지도 버티지 못하는 걸 보면. 진입금지 표지를 한 곳에 이미 나무들축축 늘어져있어. 마른눈 보다 세배는 더 무겁다네. 단풍 들기 무섭게 굵은 가지까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으니 이를 어째.

첫눈부터 폭설이라 궁궐 숲 속도 이 난리인데 궁밖의 세상은 오죽하겠어.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엄혹한 현실이겠지. 여기는 비현실인데. 

눈이 계속 내리려나 봐. 이러다 우리 파묻힐지도 몰라. 하하하~~~



진입금지.

위험하다고 들어가지 말라네.

지난주 여기에서 단풍놀이한 거 맞아? 완전 극과 극야. 가을과 겨울이 이렇게 상극이었나. 중간이 없어.


춘당지 주변길도 막혀 대춘당지와 소춘당지 사잇길에 간신히 들어설 수 있었는데, 맥없이 나뭇가지가 부러져 연에 풍덩 빠져있.

관덕정의 가을에 겨울이 포개진 것 같아. 졸지에 금지구역이 되어버렸는데 눈으로 뒤덮여 정자가 한없이 작아 보.

고개 들어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았지. 이제 고개 숙여 바닥도 봐야겠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는 거야.

크리스마스 삼색이네, 빨강 초록 하얀색 말이야. 하나하나 다 예술작품 같지. 눈에만 담기에는 아쉬우니 계속, 일단 찍고 보. 하하하~~~~~

오늘은 사진에만 집중. 사진에만 진심. 말이 없었지만 우리 이러려고 만난 거 맞지. 하하하~~~~



감사.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에 발걸음을 멈출 수 있어서 참 고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