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즐 Mar 18. 2019

보답받지 못하는 사람들

또 돌아온 NT Live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NTLive는 영국 National Theatre 앞을 걸어서 지나가면서도 (런던 강변을 걷다 보면 정말 NT 앞을 지나갈 일이 많다) 쿨하게, 그래, 티켓팅 못해도 된다, 엔티라이브로 보면 되지, 라고 넘길 수 있게 만들어준 획기적인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굳이 VR이나 360 서라운딩일 필요가 없다. 좋은 좌석을 예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편하게, 어느 자리에서든 배우들의 클로즈업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NT 라이브 덕에 톰 히들스턴의 #코리올라누스 같은 좋은 작품을 볼 수 있었고, #프랑켄슈타인, #리어왕, #맥베스, #다리에서본풍경 같은 작품들에 줄줄이 등장하는 명배우들(이언 매켈런, 케네스 브레너 등등)을 볼 수도 있었다. 이번 한국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상영하는 엔티라이브 중 하나인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나머지 하나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라>이다)도 달갑게 예매했다. 평소에 연극을 잘 보지 않는 친구를 꼬셔다 보았다. 그는 엔티라이브가 영화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야, 그 돈 주고 보는 거야, 라고 물었지만 (쇼케이스나 시사회, 프리미어로 생각했던 듯하고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어쨌든 나는 폴 뉴먼이 출연하는 동명 영화를 좋아하는지라 영상으로라도 보고 싶었다. 잭 오코넬이 연기하는 폴 뉴먼의 '브릭' 역할이 기대가 되었다.



아마도 시에나 밀러와 잭 오코넬이 출연한다는 것에 이번 엔티라이브 홍보의 방점이 찍혀있는 듯 했다. "베네딕트 앤드루스 연출(물론 스타 연출가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이 연극을 보는 사람보다 훨씬 많으니까)"보다는 "시에나 밀러와 잭 오코넬 출연"이라고 강조하는 게, 더 많은 사람에게 NT의 콘텐츠를 알리자는 취지에도 맞을 듯 하다. 게다가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는 고전 중의 고전이고 이제 그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도 없을 텐데, 그러면 대체 이번에는 무엇을 위해 사람들이 나 고양이 보러 간다, 라고 결심하게 할 것인가. 패셔니스타 시에나 밀러의 연기력 재발견, 거친 영국 남자 잭 오코넬의 상처받은 남자 연기 등은 매력적이다. 그리고 실제로 보니, 시에나 밀러는 확실히 연기를 잘 했고 잭 오코넬은 <스킨스>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그 날것의 느낌을 잃지 않고 있었다. 15분의 인터미션을 포함해 약 180분의 상영(또는 상연)시간이었는데, 1막에서 시에나 밀러의 연기가 뛰어났다면 2막은 잭 오코넬의 것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아예 지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2막 중간에 조금 자 버렸다. 



<고양이>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한 부호의 생일파티에서 미국 남부 부잣집이 갖고 있는 비밀이 드러난다, 정도로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단연 그 부호의 아들인 브릭(잭 오코넬)인데, 잘나가던 운동선수였고 또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다음에는 괜찮은 스포츠 캐스터로 살았지만 지금은 그냥 주정뱅이가 된 상태다. 간밤에 운동장에서 허들을 뛰어넘겠다고 객기를 부리다가 다리를 부순 상태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인 매기(시에나 밀러)는 가난한 집안에서 시집온 후, 브릭에 대한 사랑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지금껏 갖고 있는 여자이지만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브릭 때문에 늘 상처를 받는다. 매기와 브릭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귀가 달려있는 벽"을 통해 생중계된다. 브릭의 형인 구퍼와 그 부인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브릭을 질투하여 늘 둘을 모함하고, 아버지 빅 대디는 늙어가는 자신의 재산을 누구에게 물려줘야 할지 고민하지만 구퍼에게는 마음이 영 가지 않는다. 빅 대디의 생일날 모든 가족들이 모이는데, 중요한 발표가 이루어진다. 빅 대디는 암인가? 빅 대디는 곧 죽는가? 빅 대디의 재산은 어디로 가는가? 매기는 정말 임신을 했는가? 브릭은 매기를 사랑하는가, 매기는 브릭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우선 보기에는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브릭이 있다. 매기는 남편 브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감수한다. 구퍼는 슈퍼스타이자 아버지의 사랑스런 막내였던 브릭을 질투하여 동생 부부를 천하게 모함한다. 빅 대디와 빅 마미는 야심만만한 큰아들에게 정을 주지 못하고 브릭이 정신을 차리기만 기다린다. 그러나 매기의, 구퍼의, 빅 대디의, 빅 마미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다. 브릭은 이 땅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고 멈춰있는 시공간에 얼어붙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부의 더위로 펄펄 날뛰는 사람들의 요청에 부응해 줄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정신과 육체는 모두 과거에 봉인되어 있다. 자신이 완벽했던, 완전했던, 가장 청량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것을 가졌던 시대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는 죽어 있다. 자신의 벗이자 동료 운동선수이자 사랑했던 사람인 스키퍼로 대변되는 시대에 남아 있다. 



<고양이>의 1막은 매기와 브릭의 대화로, 2막은 브릭과 빅 대디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매기의 입을 통해 브릭이 과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빅 대디를 대면한 브릭은 왜 자신이 과거에 살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한다. 사랑받는 자들은 결국 사랑하는 자를 지배하고, 이 지배력은 무자비하게 시공간을 농단한다. 뜨거운 남부의 서사를 지배하는 것은 무대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망령으로만 존재하는 스키퍼다. 매기는 스키퍼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고, 빅 마마는 스키퍼가 죽은 방식으로 다른 누군가가 죽지 않을지를 두려워한다. 정작 스키퍼가 원했을 때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던 브릭은 매기와 사람들을 증오한다. 사랑하고 있으되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만이 가득하다. 무대에 고성방가가 난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모두들, 보답받지 못하는 생을 살고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올해의 엔티라이브에서 상연된 <고양이> 이야기를 하자면, 동성애가 금기이던 시절, 남부의 대지주들이 부호로 군림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현대화"하기 위해 약간의 각색을 거쳤다. 세련된 인테리어의 방, 전자기기가 등장한다. 더 이상 금기가 아닌 것들을 금기로 여겨지게 하려다 보니, 쓸데없이 노출을 더하고 전라신을 몇 번이나 등장시키는 건 불필요한 작태였다. 잭 오코넬이 맨몸으로 샤워를 할 때, 시에나 밀러가 자꾸 옷을 벗으며 잭 오코넬을 유혹할 때는 이상하게도 몰입이 깨진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한 장면이 연출된다. 이것은 원래부터 금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였다. 사랑이 만드는 권력, 사랑에 대한 보답과 냉대, 각자 원하는 상대에게서 거절받고 버림받아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냥 배경을 그대로 놔두어야 할 수도 있었고, 어쩌면 대사를 완전히 개작하여 정말 지금의 이야기로 바꾸어야 할 수도 있었는데 다소 어정쩡한 느낌이 강한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면이 아쉬웠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또 이 이야기를 다시, 다시, 다시, 또 다시 무대에 올릴 것이니까 그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인기이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